逍遙

아이엠러브/루카 구아다그니노 2011 본문

Movie

아이엠러브/루카 구아다그니노 2011

bakingbook 2011. 5. 10. 22:03
감독
루카 구아다그니노
출연
틸다 스윈튼, 플라비오 파렌티

부유한 레키 가문에 있는 텐크레디와 결혼한 엠마는 러시아인으로 이탈리아 상류층인 레키가문의 후계자인 텐크레디와 결혼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살림을 꼼꼼히 해내고 아들딸도 살뜰히 살피는 순종적인여성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현모양처로 겉으로 보기에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안락한 저택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엠마는 러시아 이름인 키티쉬를 버리고 텐크레디와 결혼하여 이름까지 바뀐채로 살아가는 자신이 빈껍데기인것 처럼 허전하다. 게다가 아들은 약혼자를 데리고 오고, 시아버지는 생일날 공동후계자로 아들과 손자를 지목한다. 남편 탄크레디와 아들 에도아르도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처럼 공장에 대한 문제등 사업측면에서 생각을 달리해 서서히 가문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남편과 아들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남자애인까지 있는 사랑스런 딸은 자신이 여자를 사랑함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녀는 행복해하고 그림을 전공하라는 할아버지를 거역하고 사진을 배우러 외국으로 나간다.

우아한 파티를 하고 미술 작품을 애호하는 레키집안이 처음부터 이런 부와 그에 따른 우아함을 갖추고 있었을까. 할아버지 레키는 사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여 무에서 땀과 피로 재산을 일군 사람으로 그 재산을 잘 보호하여 줄 것으로 믿고 아들과 손자에게 유산을 상속한다. 그러나 아들인 탄크레디는 공장을 매각하여 새로운 사업을 하려한다. 손자인 에도아르도는 할아버지가 남긴 가업을 계속 이어야한다고 주장 둘의 갈등은 첨예화되고 에도아르는 괴롭고 불행하다. 마치 이탈리아 귀족층의 붕계를 다루었던 자신이 귀족출신이었던 빈치니의 <레오파드>나 데시카의 <빈치콘티니가의 정원>을 연상케하는 귀족가문의 우아함과 이면 그리고 몰락을 그리던 고전이탈리아 걸작의 모습의 21세기 현대판이랄까. 파티의 모든 것을 준비하지만 정작 자신은 파티에 가있지 않고 잡지를 보거나 커튼을 치고 바느질을 하는 엠마의 모습을 통해 가족과 유리되고 자신의 방에 점점웅크리는 그녀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거기에 있되 거기에 없다.

공허한 그녀를 이끄는 것은 우연히 나타나 자신이 구은 케이크를 주고 가는 에두앙르도의 친구인 요리사 안토니오. 안토니오와 아들이 합심해 만든 레스토랑에 가서 안토니오의 요리를 맞보는 엠마는 그 요리의 맛에 황홀감을 느낀다. 그리고 아들인 에두아르도의 친구인 안토니오와 사랑에 빠진다. 진정한 성정체성을 찾아 행복해하는 베티처럼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린 삶 빚좋은 개살구 같은 삶속에서 사랑을 통해 자신을 찾는다. 그녀가 안토니오의 산중턱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나누는 정사는 사랑스러움과 생명력으로 가득차있다. 그래서 불륜이라는 생각보다는 이 사랑이 그녀에게주는 생명력과 에너지 해방감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그들은 은밀한 사랑의 행각을 에두아르도가 알게되어 말다툼끝에 에두아르도는 제풀에 넘어져 죽게 된다. 이로서 에도아르가 지키려고하던 할아버지의 공장은 매각되어버리고 과거세대는 새로운 세대로 대체된다. 비스콘티의 <레오파드>에서도 이러한 구세대와 신세대의 교체에서 신세대를 대표하는 이름이 탄크레디였다.

아들이 죽은후 레키는 자책감 끝에 장례식이 끝나고 탄크레디에게 이사실을 말한뒤, 저택으로 돌아가 자신이 입던 옷을 허물처럼 벗어버리고 츄리닝만을 입은 채 새장에서 뛰쳐나와 안토니오에게로 달려간다.

장례식이 끝난뒤 구두를 벗고 망연자실한 그녀에게 남편은 그녀의 구두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구두쪽으로 그녀가 오게 만든다. 그런 그가 그녀가 청천벽력의 이야기를 듣고하는 말 한마디가 그녀가 러시아에서 이탈리아로 와서 한 결혼생활동안의 시간이 무엇이었는지를 대변한다.

“You don’t exist.”

이영화는 고전영화를 빌려 이탈리아의 옛모습을 그리워하는 복고적인 작품일까. 아님 공허한 상류층과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만 존재하는 여성존재에 대한 여성학적인 고찰일까. 매우 부드럽고 우아한 외피에 섬세하게 연출되어진 세팅과 음악 연기 미상센 카메라움직임까지 강하게 주장하고 있지않지만 강렬함을 속에 품고 있는 영화였다. <올랜도>의 중성적매력의 틸다 스윈튼의 억제된 내면연기와 생명력을 인식하는 환희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이중적 모습의 천사나 차가운 얼음여왕같은 역할에 곧잘 맡아왔던 독특한 미모의 소유자이다. 감독들이라면 이런 페이스의 배우를 자기 영화에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우기 차가움 속에 뜨거움, 우아하게 포장되어진 귀족사회속의 본능을 그리기 좋아하는 이탈리아 감독이라면말이다.

오래간만에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이끌던 비토리오 데시카나 비스콘티니를 회상할 수 있어 좋았다. 이탈이아의 그시대 영화들을 내가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았던 시대 할아버지의 시대 이탈리아가 꿈꾸는 그것이 복고일지라도 예술적으로 아름다웠다.

엠마는 아들을 죽음에 이끈 자신에 대해 죄책감에 함몰되지 않고 해방감으로 마무리 지었는데 이것은 그 집안에 자신을 가둘 유일한 매개물이었던 아들의 죽음으로 당연한 귀결이었던듯 싶다. 결국 옛 화려했던 이탈리아에 대한 복고적 그리움과 생명력에 대한 추구는 이질적인 것은 아니었던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