逍遙
화성행궁1 본문
수원은 조선 중기부터 왕릉 후보지로 거론될 만큼 지리적인 요건을 갖춘 곳이다. 그곳에는 정쟁의 틈바구니에 28살에 뒤주에 희생된 장헌세자 즉 사도세자의 묘, 융릉이 있다. 정조는 융릉에 참배를 다닐 때마다 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다녔다한다. 이는 현릉원을 참배하고 화성행궁을 돌아보는 행차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는 < 원행정리의궤도> 를 통해 볼 수 있다.
1795년 화성이 완성되기 1년전 시작한 화성행차는 정조를 따라나선 군사가 5천여명이고 선두가 한강에 도착할 무렵 뒤의 행렬이 창덕궁을 출발할 정도의 길이에. 그 기간은 8일에 달했다고한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명분으로 했으나혜경궁 홍씨와 동갑인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회갑을 맞이 하였을 날이기도 했다. 이것은 노론의 권세속에 조마조마하며 왕위에 오른 후 당당하게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정조가 융릉 가까이 화성을 건설하고 행궁을 지은 것은 정조의 효심의 발현이자, 한편 그의 개혁정치를 반대하는 세력을 무력화시키기위한 수도이전의 꿈도 있었을 터이다.
화성을 건설하기 위해 정약용은 거중기를 만들어 공사기간을 단축. 1794년 봄 공사가 시작되어 2년 6개월만에 화성은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있었다. 정조는 퇴위하고 수원에 낙향하려 한다는 마음을 말한 적 있었는데 그런 뜻을 이루기도 전에 49세의 나이에 갑자기 죽고 만다.
정조의 아낌을 받아 정조 재위시 암행어사로 수십차례를 파견되기도 하고 천주교도라는 모략에도 보호를 한몸에 받던 정약용도 정조의 죽음이후 그가 연구하던 서학 천주교 박해에 휘말려 18년의 귀양살이를 했다.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았던 정약용은 천주교와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그를 미워하던 무리에게 그를 죽일 구실이 되버린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천주교도였던 그의 형제들 지인들이끔찍한 고문 속에 처형되는 상황에 살아남았지만, 많은 상처를 입고 권력의 뒤편으로 물러앉았다 .중농학파로 알려진 정약용이지만 귀양살이 동안 500여권의 다양한 저서를 남긴 것을 보건데 그는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문제점을 제시하고 개혁안을 내놓은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정도의 실학의 완성자 였다.
이후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위시한 세도정치가 이어져 조선왕조는 급격히 쇠락하게 되었으니, 정조와 정약용의 못다 이룬 꿈이 담긴 화성을 보는 감정은 애처롭다.
그이후의 세도정치로 인한 삼정의 문란과 피폐해지는 백성들의 민란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치까지.... 숨가쁘게 돌아가는 조선말의 역사는 예정된 비극을 향해 줄달음치지 않는가.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다.... 조선이 빨리 끝나서 새로운 국가가 세워졌던지 했어야했다고, 나라의 기가 쇠해 제국주의의 밥이 되고 일제치하에 결국 6.25 까지 이르르게 된 것이라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성에는 정조의 애민정신과 효심, 실학과 개혁정신이 들어있다.
나라의 도성으로 옮기려는 뜻이 담긴 까닭에 화성은 철저한 계획아래 건설되었다.수원 화성은 서문인 화서문, 광교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수원천으로 들어오는 북문인 화홍문, 남문인 팔달문은 이중으로 성을 쌓고 동그란 문루가 있다. 팔달산 정상에는 군사를 지휘하던 서장대가 있다.
수원천을 따라 벌판에 세워진 건물이 행궁이고, 이 행궁을 중심으로 도시 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을 조성했다.
다음으로 도시의 기관시설인 도로를 만들고, 행궁과 성문을 연결하는 십자로를 형성했다. 그리고 읍성을 쌓아 인구10만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고 십자로를 축으로 시장과 점포를 조성하였다. 또한 만석거라는 인공저수지를 만들고 다단계 수문을 설치하여 물의 양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원행궁은 정조가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러 올 때마다 머무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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