逍遙
C.S. 루이스 본문
" 나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다. 증거가 없다. 철학적 관점에서 봐도 기독교는 최상의 종교도 아니다.” 라고 외친 한 17세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정확히 15년 후에 자신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부르는 것, 즉 실제로 있었던 신의 사람과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존재를 보여주신 하나님이 곧 기독교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고 '왜 그 때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반발심으로 인해 철저히 기독교를 멀리하는 인생을 살다가 30대 초반에 극적으로 회심하여 가장 열정적이면서도 치밀한 논리로 기독신앙을 변증하는 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로 살았으며 주옥같은 신앙 서적들을 남긴 드라마틱한 인물인 C. S.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는 1989년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출생했으며 20세기 유럽 최고의 지성중 한 명이자 켐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교수였으며 1947년 'TIMES' 지가 “금세기 가장 많이 읽힌 기독교 변증가” 로 칭송했던 인물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고통의 문제' ( The Problem of Pain )등 유명한 저서들이 있습니다. 루이스의 작품 중 <순전한 기독교>는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손꼽혀왔습니다. 루이스는 뛰어난 작가이자 교수였지만 누구보다 진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존립'과 '기독교가 진리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논리적인 방법 ,'변증(辨證)' 으로 설명해내었습니다. 그가 설파한 기독교 변증의 '요체(要諦)의 집약'이 바로 책, 『순전한 기독교』인 것이지요. 이 책은 총 네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2.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3. 그리스도인의 행동
4.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
앞의 세 개의 챕터에서는 '왜 유신론 일 수밖에 없는가', '그중 왜 기독교일 수밖에 없는가', '기독교인은 왜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마지막 네 번째 챕터에서는 조금 더 깊이 있는 신학적인 이야기를 다룹니다. 비기독교인이나 아직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기독교인이 읽는다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바탕된 기독교인에게는 가장 중요한 챕터일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의 천재성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기도 합니다.그리고는 그는 스스로가 던진 고통의 의미와 문제에 대해 하나 하나 논리로 답해나가는 방식으로 글을 풀어갑니다. 그것은 <고통의 문제 ( The Problem of Pain )>에서 잘 다루어져있습니다.
그의 논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인간은 고통앞에서 비로소 잠든 마음이 깨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련이 닥치기 전까지는 인간은 쾌락이 주는 안락함 속에서 그의 영혼은 깨어나지 않는다.
물고기가 물속에 살면서 물의 존재를 못 느끼듯이 인간은 안락함 속에서는 감사와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창조주의 존재와 그에 대한 순종을 깨달을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은 쾌락과는 달리 인간이 무시하려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엄청난 존재감을 갖고 있다. 고난 속에서는 매 순간 순간 그 아픔을 인지하게 되며 고통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고통앞에서 비로소 깨어나고 겸허해진다.
고난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창조주를 찾는 마음이 생겨난다. 따라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고통은 필요악이며 이때문에 신은 인간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해왔던 자기 '의지'를 고난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내려놓게 된다."
그에 의하면 고통이 주는 유익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잘 되어 간다는 환상을 깨뜨림 = self sufficiency (자족감) 을 깨뜨림.
(2)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자기 의지, 물질, 시간 ...) 이 자기 것이라는 환상을 깨뜨림
Human will become truly creative
and truly our own
when it is wholly God's.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속해있을 때
진정으로 창의적이 되고
순수한 본연의 자아가 된다.( p.102 )
When we act from ourselves alone
- that is, from God in ourselves -
we are collaborators in,
or live instruments of, creation.
우리가 우리 본연의 자아를 통해 행동할 때,
다시 말해 우리 안에 들어와계신
하나님을 통해 행동할 때,
우리는 창조의 동역자가 되거나
살아있는 도구가 된다. ( p. 102 )
The sacrifice of Christ is repeated,
or re-echoed among His followers
in very varying degrees
from the cruelest martyrdom down to
a self-submission of intention.
그리스도의 희생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안에서
다양한 형태로 지금도 반복되고
또 울려퍼지고 있다.
가장 잔혹한 순교에서부터
자기 의지를 스스로 주님앞에
내려놓는 식으로까지...( p. 104 )
Tribulations cannot cease
until God either sees us remade
or sees that our remaking
is now hopeless.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거듭났음을 보시거나,
혹은 우리의 거듭남이
도저히 부질없음을
보실때까지 멈출 수가 없다. ( p. 108 )
그는 고통에 대해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 (complex good )을 이끌어내시는데 그것은 고통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고통 그 자체는 분명한 '악'이지만 그 고통을 통해 인간은 창조주에 대한 회개와 순종을 배운다는 점에서 복합적인 선 (complex good )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악인의 역할이 필요하듯 복합적인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고통도 필요하다.
고난과 시련앞에서 인간은 가능하다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 고통이 하나님 뜻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면 기꺼이 감내하려는 순종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계속 주시는 이유는 1) 계속해서 연단하시려는 목적과, 2) 이 세상에서의 고통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상이 결코 종착역이 아니며 따라서 이 세상만으로 만족을 느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급함을 잃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다만 지속적인 고통을 준다면 인간은 견딜 수 없기에 인생 사이 사이마다 일시적인 즐거움과 평화를 함께 주시는 것이다.”
그는 이번 책에서 루이스의 저술 활동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각각의 책이 지닌 장점과 의미도 놓치지 않고 소개한다. 특히 앞부분에 실린 루이스의 생애와 부록으로 첨부된 루이스 읽기 가이드는 실용적이다.
루이스 입문서를 묻자 그는 주저 없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꼽았다. 그는 “루이스의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나니아 연대기’도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판타지 장르에 거부감이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천국과 지옥의 이혼’ ‘순전한 기독교’ ‘영광의 무게’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용기는 단순히 미덕의 한 종류가 아닙니다. 시험의 순간에 모든 미덕은 용기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치관이 결여된 교육은, 그것이 아무리 유용하다할지라도, 사람이 아닌 영리한 악마를 만들어낼 뿐이다.
이세상의 그 어떤 것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갈망이 내안에 있다면,그것에 대한 유일한 이성적인 설명은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일겁니다.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십시오.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매일의 야망과 이루고 싶은 바람들과 죽으을,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몸의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온몸과 온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남겨두지마십시오. 주지않은 것은 죽음을 떨치고 일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찾으면 결국 미움과 외로움과 절망과 분노와 파멸과 쇠퇴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작가소개:
'겸손은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게 아니라 당신에 대한 생각을 적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C.S 루이스는 부모님 사망이후, 15살 무신론자가 되었다가 30살에 돌아올 때까지 기독교이론의 반대진영에 서있었습니다. 그는 1898년 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생. 1925년부터 1954년까지 옥스퍼드 모들린 칼리지 교수로 있었으며, 1954년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쳤고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신앙을 버리고 완고한 무신론자가 되었던 루이스는 1929년 회심한 후, 치밀하고도 논리적인 정신과 명료하고 문학적인 문체로 뛰어난 저작들을 남겼습니다. 기독교에 대적하는 가운데 반기독교 진영의 간판 스타격으로 활동하며 당시의 크리스천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인 경험을 한 뒤 완전히 회심하여 기독 신앙의 철저한 변증 사상가로서 활약했고,신약 성경의 절반 이상을 저술함으로써 현 기독교 사상의 초석을 다진 당대의 대학자였던 사도 '바울' ( Paul ) 과 흡사합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서들이 없었다면 지금 시대 이토록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일이 있을 수 없었고,마찬가지로 C.S. Lewis 라고 하는 철두철미 반기독교 신앙의 지식의 정점에 서 있던 지식인의 회심은 세상의 많은 그와 같았던 완고한 적그리스도들이 그리스도의 편으로 돌아서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루이스의 초기 저작 중 유명한 <침묵의 행성에서>그는 이후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기독교 변증론을 펼친 인물로 손꼽히게 됩니다.신에 대한 원망과 구원, 사적인 감정이 뒤섞인 책 <헤아려 본 슬픔>은 N.W. 클러크라는 가명으로 출간되었으며, 루이스와 아내 조이의 사랑은 <쉐도우랜드>(shodowland, 1993)라는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한 것이었습니다.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이 만든 영화 속의 루이스와 조이는 각각 안소니 홉킨스와 데보라 윙거가 맡았습니다. 아마도 루이스가 20세기 판타지 작가를 넘어서 오늘날에도 이처럼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힘든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회의를 통해 더욱 성숙해 지기를 갈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루이스의 친구였던 오언 바필드(Owen Barfield)는 루이스 안에 세 명의 다른 루이스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영문학자이며 비평가로서 명성을 날린 루이스, 두 번째는 <나니아 연대기> 같은 작품을 쓴 아동문학가로서의 루이스, 세 번째는 널리 알려진 기독교 작가로서의 루이스입니다.
“루이스의 삶을 보면,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하고 기독교 변증가로 인정받았지만 옥스퍼드대 등 학계에서는 ‘지적 매춘’을 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를 감수하며 살았다”며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힘들고 어렵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과학에 반대한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저는 다만 과학이 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학적인 사람일수록 이런 제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제가 믿기에는 그렇습니다). 물론 과학은 유용하고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왜 존재하느냐, 과학이 관찰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무언가-그 사물들과 다른 종류의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과학이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만일 '배후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들에게 전연 알려지지 않거나, 알려지더라도 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알려지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상식의 문제입니다. 언젠가 과학이 완벽해져서 전 우주에 있는 것들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설사 그렇게 되었다 해도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우주가 지금처럼 지속되고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은 지금과 똑같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난감한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 줄 길이 하나 있습니다. 외부의 관찰로는 알 수 없는 내용들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대상이 전 우주에 딱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단순히 관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인간입니다.
다음과 같은 점에 한번 주목해 보십시오. 만일 전기나 양배추를 연구할 때처럼 인간을 외부에서만 연구하는 이가 있다면, 즉 우리 언어를 몰라서 우리의 내면에 대한 지식을 전혀 얻지 못한 채 단지 행동만을 관찰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우리에게 도덕률이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인데 도덕률은 우리가 해야 하는 행동을 다루는 것이니, 어떻게 증거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돌이나 날씨의 경우에 설사 관찰 가능한 사실들 너머에 무언가가 존재한다 해도, 외부의 연구만 가지고서는 그 무언가를 발견할 희망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우리는 우주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우연히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게 만든 힘이 배후에 있는지 여부를 알고 싶습니다. 만일 그런 힘이 정말 존재했다면, 그 힘은 관찰 가능한 사실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사실들을 만들어 낸 실재이므로 단순한 사실 관찰을 통해서는 찾아 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 너머의 존재가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해 그런 배후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달리 표현해 봅시다. 만약 우주 밖에서 우주를 통제하는 힘이 있다면, 그 힘은 우주 안에 있는 사실들 중 하나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집을 지은 건축가가 곧 그 집의 벽이나 계단이나 벽난로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 힘은 오직 우리를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내면의 영향력이나 지배력으로서만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우리 내면에서 그런 힘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신이 그토록 전지전능하면서 또한 사랑의 신이라면 왜 이 우주와 세상이 이렇게 고통과 무의미로 가득차 있는가?"
"신이 인간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왜 그들에게 행복을 주는 대신 한 평생을 고통속에 살다 결국 늙어 한줌 흙으로 돌아갈뿐인 공허한 세상을 창조했는가?"
그는 이 사실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결정적인 증거로 생각했고 그것이 자신의 무신론의 핵심이었노라고 고백합니다. 지성을 가졌고 사랑을 품은 신이 만든 우주가 이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문제 ( The Problem of Pain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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