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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한국등산

쫓비산 청매실농원

bakingbook 2012. 4. 2. 15:12

쫓비산+청매실농장

갈미봉 - 쫓비산 (537m) 능선 산행은 10여개의 작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며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물줄기와 매화농원으로 하산하면서 만개한 매화무리를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매화마을까지 무수한 매화의 모습은 꽃구름이라 할만하다.

섬진강변의 백매화와 청매화, 홍매화가 이제 활짝 꽃잎을 열기 시작. 한 겨울에도 봄 날씨같은 날이 계속됐다지만, 이 땅의 봄은 섬진강변의 매화가 전하는 꽃소식으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라나.
추위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 그래서 매난국죽 사군자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청렴하고 세속을 초월한 절개. 꽃을 틔운 나무가 늙고 파리할수록, 신선을 연상케하는 기품. 부드럽게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향기  가히 엄동설한에 아름다운 향기를 품으며 피어나는 매화는 기개있는 아름다운 꽃이다. 수묵화시간에 매화를 그리면서 실제 매화의 모양새를 모른다는 것을 절감했었다. 매화의 꽃잎은 다섯 매화꽃받침과 수술 등

올해는 작년에 못갔던 섬진강변을 가보고 싶었다.광양 섬진강 물길과 나란히 달리는 861번 지방도 변의 봄은 매화꽃으로 별천지를 이룬다.그래서일까 일요일 이 지방도는 각지에서 몰려온 차량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 겨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늦추위로 인해 만개해야할 섬진강변 매화는 홍매화만 조금 피었을뿐 하얀봉오리들만 세찬 바람에 꾿꾿이 기다림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길을 따라 도열한 매화꽃이 만개하지는 않았지만  이리저리 물줄기가 굽이치는 섬진강을 내려다 보는 것과 마침 매화축제의 끝을 알리는 시장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다음주 정도면 남도 땅의 매화가 환한 꽃망울을 터뜨리고 쌍계사의 벚꽃도 피렸다. 산행시간이 늦어질것 같아 산행을 청매실 농원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매화골 섬진마을

하동 읍내를 에돌아 흐르던 강물은 섬진교 아래에서부터 흐름이 해류처럼 더뎌지고 때로는 호수처럼 잔잔해진다. 하구가 멀지 않은 탓이다. 호수 같은 강과 깨끗한 모래사장이 드리워진 강가에는 송림이 울울하다. 하동을 '백사청송(白沙靑松)의 고장' 이라 일걷게 만든 그 솔밭이다. 면적이 2,000평쯤 되는 이 송림에는 수령 100∼200년의 노송 900여 그루가 빈틈없이 들어차 있는데, 먼 옛날 신라와 백제의 사신들이 이곳에 모여앉아 군사동맹을 맺었다고 한다.

송림 바로 위쪽에 가로놓인 섬진교를 건너면 바로 전라도 광양 땅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만 나는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십 리쯤 가면 '매화골'이라 불리는 다압면 섬진마을에 이른다.

3월 중순경의 이른봄, 섬진강가의 이 작은 마을은 활짝 핀 매화꽃으로 사방천지가 온통 눈을 뿌려놓은 듯 새하얗게 채색된다. 마을 고샅길의 무성한 꽃그늘 속을 걸으면 온몸을 휘감는 매향에 정신마저 혼몽할 지경이다. 이따금 나뭇가지를 할퀴고 지나는 강바람에 하얀 꽃잎이라도 우수수 날리면 서설(瑞雪)이 따로 없다. 또한 꽃과 잎을 달지 않는 철에는 고목 특유의 자유분방하면서도 운치 있게 뻗은 줄기마다에서 어떤 기품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다.

섬진마을의 매화밭은 사람의 손으로 심고 가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언뜻 보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산비탈에 비스듬히 서 있든지, 커다란 바위틈이나 개울가에 서 있든지 간에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싹을 띄우고 자라나서 꽃을 피운 듯이 자연스럽다.

매화꽃이 절정에 이르는 3월 10일에서 20일경에는 비탈진 매화밭의 풀숲에서 겨우내 움츠려 있던 풀꽃들도 하나둘씩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매화꽃의 눈부신 자태에 넋을 빼앗긴 이들에겐 눈에 잘 띄지 않겠지만, 매화밭의 풀숲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산자고·현호색·제비꽃 등을 만날 수 있다. 독특한 생김새와 꽃빛의 아름다움이 매화에 못지않은 우리 고유의 풀꽃들이다.

매화꽃터널 아래의 오솔길을 굽이돌아 쫓비산(536m) 중턱에 올라서면 웅장한 지리산을 껴안 고 유장히 흐르는 섬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염없이 보고 또 봐도 지리산과 섬진강은 역시 산 중의 산, 강 중의 강임에 틀림없다.

 청매실농원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매화나무 집단재배를 시작한 곳.매실 명인 홍쌍리씨가 집념으로 일군 매화꽃동산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일본에서 광부로 일했던 홍씨의 시아버지 고 김오천옹이 처음 이곳 산비탈을 갈기 시작했다. 이 일대는 당시만 해도 밤나무가 많은 '밤골'이었다. 김오천옹은 일본에서 가지고 들어온 묘목을 심어 밤나무 1만주,매화나무 2000주의 농원을 개간했다.  

 

 

 

 

 

 

 

 

 

 

 

 

 

청매실농원을 들어서면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찍은 초가집 세트장이 나온다. 이 초가집을 중심으로 곳곳에 시비가 세워진 문학동산이 펼쳐져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문학동산 일대를 가득 덮은 매화꽃 풍경이 마음을 빼앗는다.

산비탈 가득한 매화 꽃구름과 땅바닥을 덮은 보리싹의 색상조화에, 하얀 저고리 파란 치마를 입은 수줍은 시골처녀 이미지가 물씬 풍긴다. 섬진강 모래톱과 강 건너 하동 땅도 한눈에 잡힌다. 농원 뒤편의 짧은 대나무숲길도 운치있다. 2000개가 넘는 재래 장독 풍경은 더 말할 게 없다. 올해는 매화꽃길을 좀 길게 산책할 수 있다. 소학정주차장에서 청매실농원까지 '쫓비산'(뾰족한 산)허리를 타고 가는 산책길이 정비돼 있다. 4.5㎞ 정도로 2시간가량 매화를 비롯한 봄꽃 내음에 푹 젖을 수 있어 좋다.

청매실농원에서 섬진강을 왼편에 끼고 내려가면 나오는 망덕포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윤동주 시인의 친필 유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역사의 현장이 있다. 국문학자 정병욱(전 서울대 교수)의 옛 가옥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던 해인 1941년 시집을 펴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가기 전 원고 한 부를 동문인 정병욱에게 맡긴다. 이후 정병욱이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그의 모친에게 원고를 맡겼고,모친은 해방이 될 때까지 마루바닥을 뜯고 그 밑에 원고를 숨겨놨다는 것이다. 망덕포구는 벚굴이란 커다란 굴이 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섬진강 물길이 남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자라는 '강굴'인데 그 알맹이 크기가 보통 굴의 5배나 된다. 물속에 있을 때는 벚꽃이 핀듯한 모습이라거나, 벚꽃이 필 때쯤 제일 맛있다고 해서 벚굴로 불린다.  

 

 

 

광양의 매화마을은 축제가 한창이다. 광양의 명물은 매실이거니와 광양밤도 맛이있다. 광양밤을 한무더기 사고나니, 할머니 인심이 맘에 들어  장에 좋아 산행에서 체하거나 할때 도움이 되는 매실도 샀다. 엑기스는 집에 있으니 여러모로 쓸수 있게 매실절임을 샀다. 차로도 마시고 반찬으로도 쓰자. 그리고 섬진강의 명물인 재첩국을 먹어야한다고 한다. 축제장 곳곳에 간이 식당이 있었으나, 점심에 만난 산객이 준 족발 삼겹살을 너무 많이 먹었다. 재첩국을 먹지 못해 조금 아쉽다.

일명 '가막조개' 로도 불리는 재첩은 민물조개이면서도 순수한 민물보다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하구의 모래에서 잘 자란다. 그러나 물이 오염되기 시작하면 금세 자취를 감춰버린다. 한때 부산의 수영강과 낙동강 하구도 재첩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으나,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재첩이 지금껏 나는 데는 강원도 고성군의 송지호와 이곳 섬진강 하류뿐이다. 섬진강 언저리의 마을과 국도변에는 재첩국 파는 음식점이 즐비하다. 예전에는 바깥주인이 재첩을 잡아오면 안주인이 재첩국을 끓여 파는 식이었으나, 지금은 대개 재첩잡이를 생화(職業)로 삼은 사람들에게 재첩을 사들인다. 재첩을 잡는 방식은 남녀가 조금 다르다. 아낙들은 주로 수심이 얕은 가장자리에서 손으로 모래밭을 뒤적거려 잡고, 남자들은 틈을 성기게 만든 철제 삼태기를 사용해서 잡는다. 긴 대나무 손잡이가 달린 삼태기로 강바닥의 모래밭을 훑으면 알이 가는 모래나 어린 재첩은 틈새로 빠져나가고 다 자란 재첩만 남게 된다. 물이 얕은 곳에서는 물 속에 몸을 담근 채 삼태기질을 하지만 깊은 곳에서는 전마선을 타고 작업해야 한다. 언뜻 보기와는 달리, 재첩잡이는 아주 고달픈 일이라고 한다. 시종 허리를 구부린 상태로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흐르는 물을 10여 분 가량만 응시해도 현기증 때문에 몸을 가누기조차 어렵고, 모래밭에 박은 삼태기를 끌어당기는 것도 체력 소모가 극심하다. 수온이 낮은 겨울철에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고통까지 뒤따른다. 그래도 이런저런 어려움을 감내하고 나면 하루 3∼5만 원쯤의 수입을 올릴 수 있고, 솜씨 좋은 이들은 10만 원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그래서 아예 농사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날마다 재첩잡이에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옥룡사지 동백숲도 광양의 자랑거리다. 백운산의 지맥인 백계산 남쪽에 있는 옥룡사지는 8세기 초 도선국사가 세우고 35년간 주석했다가 입적한 절터라고 한다. 도선이 처음 절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 동백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동백나무의 생명주기는 300년 정도.도선이 심고 나서 세 사이클을 돌았다고 하니 숲이 조성된 지 1000년은 족히 된 셈이다. 6000여 그루의 동백이 울창한 숲은 천연기념물 489호로 지정돼 있다. 도선의 옥룡사는 주춧돌이 발견되지 않아 복원이 어렵다고 한다. 다만 이 일대 마을을 '승뱅이골'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절의 규모를 유추해볼 수 있다. 비석거리를 거쳐 운암사로 넘어가는 짧은 산길의 동백숲이 특히 운치있다.

섬진강변 하면 생각나는 것 박경리의 <토지>의 무대 평사리 아니던가. 화개장터를 뒤로 하고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이십 리 가량 내달리면 내내 바투 다가서 있던 산자락들이 별안간 저만치 달아난다. 드넓은 악양벌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 들녘의 한쪽에 들어앉은 평사리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뒤쪽으로는 지리산에서 흘러내린 신선봉과 형제봉에 등을 대고, 앞쪽으로는 도도히 굽이치는 섬진강을 마주하고 있으니 대하소설의 무대로는 딱 제격인 듯싶다. 그러나 『토지』의 '서희 아씨'가 살던 최참판댁은 평사리에 없다. 집터가 있다고는 하지만, 기실은 악양면 상신마을의 조부잣집을 모델삼아 작가가 상상력으로 지은 허구의 공간일 따름이다. 그래서 최근 하동군에서는 평사리 상평마을에 3,000여 평 부지를 마련해 최참판댁을 비롯해 『토지』속의 한옥 몇 채를 짓고 있다. 아예 소설 속의 공간을 재현해놓고 외지 관광객들을 확실하게 끌어들이자는 뜻에서다. 지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평사리는 넓고 평평한 모래밭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물 밖으로 드러난 백사장만 해도 어지간한 해수욕장 못지 않게 규모가 크다. 이처럼 넓은 모래밭은 하 구까지 이어지는데, 하동읍 흥룡리 쯤부터는 섬진강의 명물 재첩이 무진장 채취된다. 하동군에서 채취되는 것만 해도 1년에 600∼700톤, 값으로 치면 12여 억 원어치에 달한다고 한다.

그 밖에 화개 장터와 하동포구 또한 유명하지 않은가. 화개장터 언저리에서 화개천의 물줄기를 아우른 섬진강은 강폭도 넓어지고 수량도 훨씬 더 풍부해진다. 〈하동포구〉 노랫말처럼 물새가 울고, 달이 뜨는 하동포구의 팔십 리 뱃길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화개나루에서 남해안의 섬진강 하구에 이르는 이 뱃길은 실제로 34km, 즉 팔십오 리에 이르지만 흔히 '하동포구 팔십 리' 라 일컬어져 왔다. 반세기 전만 해도 화개장이 우리나라 7대 시장의 하나로 번창했던 데에는 이 뱃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장이 서는 날이면 소금과 어물(魚物)을 바리바리 실은 황포돛배들이 팔십여 리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와 화개나루에 닻을 내렸다. 가까운 광양·남해·여수 등지는 물론이고 멀리 부산에서 올라온 배들은 구례 구만들의 쌀·보리와 지리산 화전민들의 두릅·더덕을 가득 싣고 다시 섬진강 물길을 따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황포 돛배도 백발 성성한 이들의 기억 속에서나 떠다닐 뿐, 지금은 재첩잡이 전마선이나 조각배들만 간간이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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