逍遙
드라마<추노>로 보는 조선시대선비들의 명문과 실리 1 본문
텔레비젼을 잘 보지 않아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님) 근간 본 드라마가 없었는데, 요즘 시간되면 챙겨보려하고 못보면 재방송이라도 보는 드라마가 있다. 그나마 토욜 재방은 산행으로 인해 보기 힘들었다. 항간에는 영화 <300>을 연상시키는 남배우들의 복근과 역동적이고 선명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레드원 카메라로 회자되는 <추노>라는 드라마. 이 드라마의 작가가 내가 재밌게 본 <7급 공무원> 의 시나리오 작가출신이란 점도 관심요소지만, 나의 흥미를 끈 것은 <추노>가 다루는 역사적 배경과 악역을 담당하는 황철웅이란 캐릭터다. 이 드라마의 배경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왕위를 찬탈한 인조와, 그 당시 정권을 잡았던 서인세력이 득세하던 시대다. 또한 그들이 광해군 시절의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고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뒤집는 친명배금이라는 명분론을고수함으로인해 일어난 병자호란 , <남한산성>에서 40일 동안 임금과 벼슬아치들이 항전하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삼고구례를 행하던 치욕적인 사건, 그후로 인조가 자신의 장남인 소현세자와 며느리강빈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 마저 귀양 보내 두 손자를 죽인 역사와 관련이 있다. 선비가 문제다
조선의 사대부라는 작자(?)들이 끊임없이 분열하며 자기복제까지 하던 붕당의 계보는 나도 넘 골치 아파서 외우지도 못하겠다. 무엇보다 이해를 할 수 없다. 하지만, 머리가 지끈 거려도 그들의 발생과 과정을 되집어 볼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원산지인 중국도 버린 낡은 유교사상의 껍질을 빌려 쓰고는 조선이 망한지 한참이나 지난 지금도 그 허장성세를 깨지 못한 채 일부 지식층이나 권력층이 소위 명분론을 내세워 대다수 백성의 희생을 요구하며 사회적 약자를 밟고 시스템을 유지하는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 똑같은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왜 이 사대부 즉 조선에서 절대선이자 절대귀족이던 선비계급이 문제냐면 그들이 신봉하던 성리학의 명분론 때문이다. 이거 이거 아주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 단순한 명분때문에 애꿎은 사람 많이 죽어나갔고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래간 500년 조선 왕조와 함께 연명하며, 결국 나라의 존망까지 위태롭게 했으니말이다. 이게 신파주의처럼 우리의 속성일까 싶기도 한 것이 작금의 상황이기도 하고 서슬퍼렇게 칼만 안들었지 서로 죽이려는게 현재 속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선비'는 고려말의 신흥무장 세력인 이성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개창한 신흥사대부와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를 모두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사림파는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나라의 원기인 성리학을 지키는 파수꾼임을 자임하였다. 이들이 이념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물질이 아니라 도의적 명분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배금주의와 물질만능의 시대인 지금과는 현격히 다르다. 인간의 도덕심을 저버리고 물질만을 추구하는 것은 금수일 뿐이라고 여겼기에 개화 또한 늦어지게 된 것이다. 물론' 성리학 때문에 망했다' 는 일본 관학자의 주장을 추종해서 우리의 선비들을 개무시해서는 안되겠다. 역사는 비판과 반성이 생활화되어야한다. 지나간 과거의 사실 어느 누구의 관점으로도 윤색될 수 있는 것이기에..... . 문제는 이 숭고한 선비들의 위선적인 짓꺼리다. 고려의 공민왕에서부터 있었던 반원친명의 사대주의권력세력도 다른 한가지다. 조선의 왕과 백성 그리고 같은 선비들끼리도 자기 편아니면 속이고 죽이고를 반복하며 배신도 떡먹듯이하는 그들이 명나라에는 왜 그리 충성을 다바쳤을까.... 고려를 망하게 하고 조선을 연 혁명세력은 혈통상 약점이 있는 서얼들이 많았다. 그들이 사회상층부로 편입되는 방법은 혁명뿐이 없었다. 그들이 권력을 잡자마자 한 일은 고려 권문세족이 지닌 기득권을 무력화시키는 토지 개혁이었다. 그렇다. 토인비가 말한대로 우리역사도 "도전과 응전" 의 역사다. 태조를 내세워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일등 공신 정도전 또한 서얼이었다. 신권과 왕권사이에 신권이 더욱 우세한 듯 보이던 시점, 정도전이 아버지를 도와 고려충신들을 몽둥이로 때려잡는 일도 서슴치 않던 장자 이방원을 무시하고 태조와 강비 사이의 서자 방석을 왕위에 앉히려 한것이 이방원의 분노를 샀다. 이후 '왕자의 난'으로 형제와 개국공신들에 대한 살륙이 벌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방원의 견제로 인해 왕권에 대해 신권의 우위를 추구하던 정도전의 실험은 실패했지만 그 정신의 일부는 사림파에게 계승되었다. 이후로 서얼 출신들은 정권으로 이입되는 출구가 막히게 되고, 사림파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강화하기위해 지배체제를 만들었던 선조대 이후엔 신분적 배타성과 세습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같은 사림파라도 서얼은 차별되는데 이는 16세기에 사림파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며 기성관료를 멸시하는 풍조와도 관련이 깊다. 예외적으로 정조 때 서얼출신들이 대거 관직에 등용되나 정조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 선비들의 세상이 된다. 조선의 문약 (文弱)
이 사림파 지배 즉 사족체제의 부작용은 사회의 건강성이 상실되고 문약하다는 것이다. 성종이후 문반과 무반의 차별은 극대화되고 소위 기술직을 천시하게 된 것이다. 이로인해 왜군이 임진왜란 때 부산을 함락시킨 후 거침없이 한양으로 향해 북상할 수 있었던 것도 군대를 양성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즉 사림파는 사회지도층으로서의 의무는 회피한 채 특권만을 앞세움으로써 양인 개병제를 허구화시키고 , 이로인해 임진왜란을 막지 못해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선비의 배반/ 박성순>
임진왜란 중에도 사림파는 서인, 북인, 남인으로 갈려 당쟁을 엄추지 않았고 공훈을 세운이들의 영향이 확대되지나 않을까하여 이순신을 비롯 선조가 도망가있는 동안 항쟁했던 많은 의병장을 죽이려했다. 김덕령 장군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고 홍의장군 곽재우도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산으로 숨어 들어가고 말았으며 , 이순신 장군 또한 노량진 앞바다에서 자살 (?)하고 말았다. 그당시 선조의 질투심을 생각컨데 조정에 편이 없었던 이순신 장군은 돌아가봤자 죽음뿐이 없었다. 이순신의 자살설을 주장한 숙종 때 시강원 문학 이여는 " 북인들이 이순신의 죄를 떠든 목적은 실상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을 잡는 데 있었다." 라고 쓰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순신이 의리명분과 허장성세가 주류를 이루던 사림파와 달리 실지로 조선 전기 과학기술을 해전에 응용한 철저히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곽재우는 벼슬을 계속 마다하고 은둔하며 마지막으로 당쟁의 폐단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지금 왜적의 괴수 풍신수길이 급사하고 왜적이 물러난 것은 중흥의 기회이다. 그러나 조정은 동서남북으로 붕당하여 서로 헐뜯고 공격하니 국가와 사직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 이황의 망령
이러한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사림파가 미워한 왕이 있었으니 바로 광해군이다. 광해군은 '존명배금'이라는 의리론과 임금의 마음수양이 정치의 근본이라는 사림파의 비현실적인 태도를 경멸한 군왕이었다. 명나라는 이미 기울고, 후금(청)이 새로운 강자가 될 것이기때문에 그는 강홍립을 통한 실리중립외교를 펼치는데, 이것이 나중에 그를 폐위시키는 구실이 된다. 광해군의 실정(失政)은 광해군의 문제보다는 광해군을 업고 권력을 천단한 대북파에 비롯된다.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 원망을 품으며 소북이 비웃는 상황이 지속된 것은 선조 때 당파싸움과 관련이 깊다. 일본과의 싸움을 주장한 대북파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소북파와 투쟁을 했고 일단은 대북파가 민 광해군이 세자가 된다. 문제는 적자가 없던 선조가 인목대비를 통해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은 것이다. 이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파와 대북파는 힘겨루기를 하게 되었고 암투 중에 선조가 급사하게 된다. 이에 대북파가 발빠르게 움직여 인목대비는 폐위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 귀양가 음식도 없는 불붙은 듯한 방안에서 울다가 기력을 다해 최후를 맞이한다. 이 사건은 페모살제를 저지른 부도덕한 왕이라는 빌미로 서인들의 쿠데타, 인조 반정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광해군을 옹립하여 권력의 우위를 점하려던 대북파도 정작 광해군의 실리적 정치하에서는 별 재미를 못보게 되고 광해군이 폐위 될 때 힘을 실어 주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폐위된 광해군은 제주도로 귀양가 하녀에게까지 천대를 받으며 살다가 67세의 나이에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인조 반정세력이 지목한 대북의 수괴는 이이첨, 이산해, 정인홍인데 이중 이산해를 제외한 두사람의 말로는 비참하다. 그중 정인홍의 죽음은 억울한 것이었다. 정인홍에 대한 서인의 보복은 매우 잔혹해 89세 고령의 정인홍은 거리에서 시체를 찢어 사방에 돌려가며 효시한 능지처사라는 극형을 받는다. 실제 그는 인목대비 폐모와 영창대군의 처단을 오히려 반대한 불인지심을 아는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그런 오명이 씌워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존명사대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주자학 교조주의(敎條主)를 강조, 집권유지를 하려던 사림파에 그가 정식으로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올곧고 강직한 성품에 평생을 처사로 살다간 남명 조식은 이황과 당대 학계의 쌍벽을 이루는 거목이었는데 이황이 조식을 비난하면서 둘 사이에 틈이 생기고 말았다. 정인홍은 바로 이 조식의 수제자였다. 조식학파는 정권과 거리를 두며 현실주의 입장을 유지한 반면 이황은 사림파의 조종(祖宗)으로 성리학의 연원으로 생각되고 있는 인물이었다. 조식의 법통을 계승한 정인홍은 입으로 말하고 실천하지않는 사람들의 허위를 매우 싫어하여 남인의 추앙을 받던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제사에서 삭제하고 반대하는 성균관 유생들을 축출해 반감을 산다. 또한 원나라 허영의 ' 나간즉 실천이 있어야하고 처한즉 지킴이 있어야 한다' 는 정치질서 변혁과 관련된 경세적 측면을 두둔했는데 허영은 사림파들에게 성리학의 순수형이상학적인 측면을 훼손시킨 주범으로 여겨지던 터였다. 결국 조식이 이황을 비판했던 점 등이 영향을 미쳐 정인홍을 괘씸죄로 죽게만든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들이 몰락했고, 이후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들은 씨가 마른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세력은 훗날 흥선대원군이 등장하기까지 무려 250여 년에 걸쳐 오랜 세월 집권한다. 물론 중간에 남인이 잠시나마 정권을 잡은 경우도 있지만말이다. 인조말에는 집권당인 서인이 또 분열한다. 그리고 노론이 등장하는데 그 거두는 송시열이었다. 메이저 노론에 소외당한 소수의 서인을 소론이라 불렀다. 송시열은 자신의 성리학에 대한 성찰을 반영하는 이황의 작업을 계승하는 <심경석의>를 편찬하면서 이황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보완하는데 여기서, 이황의 후예들과 윤증일파에게 이황을 경시했다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게 된다. 이황이 여러모로 문제를 일으킨다. 조선 성리학의 거두로써 거의 신처럼 모셔졌다는 야그. 이황 이전에의 정치싸움은 사화였으며 학자는 초당적 지지를 받았다면 ,이황 이후는 댕쟁이었으며 학자는 당파적 지지를 받았다. 선비들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파와 가문을 위해서 당쟁을 일삼았고 사림계는 분열을 거듭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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