逍遙
드라마 <추노> 로 보는 조선시대의 명분과 실리 2 본문
조선의 시스템
<추노(推奴)>에서 배경이 되는 소현세자의 추종세력과 인조의 추종세력의 대결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의 연장선상에 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또한 광해군 못지않은 일을 저지른다.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못하는 인조와 권력층은 청나라로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강빈이 귀국하자 그들을 냉대하고 멸시한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함께 포로로 끌려온 피폐한 백성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고저 농사와 장사를 시작하여 큰 돈을 벌게 되었고 청나라와도 실리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신문물을 공부하여 실리주의에 눈뜬 소현세자는 기존 권력층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신하들의 사주에 놀아나는 인조 또한 어리석은 임금일뿐으로 귀국한 소현세자가 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리자 벼루로 얼굴을 내리치고 신하들이 예우하는 것조차 막았으며, 청나라의 첩자인양 계속 감시를 했다. 소현세자는 10년동안 온갖고생을 하고서 고국에 돌아온 지 수개월만에 병이 들고 의관들도 함부로 약을 쓰다가 사망에 이르렀는데 그 주검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고한다.
인조 23년 6월27일 소현세자의<인조실록>의 졸곡제(죽은 지 석 달 후에 지내는 제사) 기사를 보면 소현세자가 독살당했을 가능성을 짙게 암시하고 있다.
" 세자는 귀국후 얼마 안되어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 수일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와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다.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 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고, 임금도 몰랐다."
<조선왕조실록> 의 기록을 보건데 . 인조가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어도 사주를 하거나 방관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그것을 입증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그후 인조의 행보를 보면 수상쩍다. 인조 치세 말년에 의심은 정신병자 수준이었다.
" 인조 24년 1월 3일에는 전복구이에서 독이 발견되자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을 의심하여 강빈을 후원 별당에 유치해 놓고 문구멍으로 음식물을 넣어주게 하였다. 인조는 강빈이 왕권에 도전할 기미를 보인다고 알고 있었고, 이로인해 소현세자를 죽인 데 이어 자신의 손자인 세 아들마저 죽여 없애라는 은밀한 신호를 보냈다. 소현세자를 독살한 이후 김자점 일파는 부인 강빈의 형제들과 세아들을 귀양보내 첫째와 둘째를 죽인 뒤 황급히 둘째 봉림대군을 왕세손으로 책봉하는 변칙을 자행한다. 중신 대부분이 세손의 세자책봉을 주장했으나 국유장군론을 내세운 인조의 강한 의지때문에 결국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조선 17대왕 효종에 오르게 된다. "
패륜을 행했다고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와 그들 자신이 장자의 아들이 세자를 이어받는 유교의 대의 명분을 뒤집어 버린 것이다.
인조의 소현세자에 대한 증오심은 그정도로 강했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제주로 귀양가서 그 중 두명은 귀양지에서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병에 걸린 두명의 손자는 의원도 약도 없이 방치되어 죽었다고 기록된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와 별로 다름없는 모습이다. 물론 인조는 이 사건으로 손자들의 죽음에 의문을 풀겠다고 국문을 하였으나 그것은 책임을 회피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피하려는 쇼였지 손자들을 사랑해서는 절대 아니었다. 손자들을 그렇게 사랑하는 인조가 4살짜리 막내 석견까지 귀양 보낸 사실을 보면 말이다. 이 시절 인조의 의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신하들이 말려야할 정도였다고한다아들들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강빈을'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타고 저주했다'는 누명을 씌워 사사하고 강빈의 집안형제들까지 처단하여 멸문을 만들었던 이 흉악무도한 행위는 무언가를 몹시 두려워한 제발 저린 사람들의 행동이고, 인조의 묵인 없이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의 포악한 임금은 연산군을 비롯 꽤 있었으나, 법정에서도 행위를 저지른 자보다 사주한 범죄를 더 극악하다고 본다. 인조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악인이었다.
인조 다음 왕인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 효종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8년정도 머물다가 돌아왔지만, 소현세자와 달리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추진했던 임금이다. 그와 함께 신문물을 들여와 기울어가는 나라를 재건하려던 소현세자와 강빈의 꿈도 사라져버렸다.
서인정권의 위선과 기만은 당시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하에 처들어온 후금에 대해 강화를 하는데 막후 교섭을 하였던 강홍립을 포상은 커녕 역신으로 몰아 자살하게 만들었고, 존명배척을 지키고자 명나라로 도망갔다 청에 붙잡혀 곤욕을 치른 임경업을 무고하여 죽게하는 등의 사건으로도 드러난다. 사실 사림파가 내세운 존명배청 또한 정권유지를 위한 구실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광해군에게 페모살제의 명분을 씌워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 반정의 도덕적 명분 자체가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고 오로지 정권찬탈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존명배청의 허울좋은 명분으로 야기된 병자호란 시기 남한산성에서 왕과 권력자들이 숨어있는 동안 성 밖에서 백성들의 고초는 말이 아니었다. 청태종은 이미 청국의 조선 침략이 조선의 편향적인 대명의리때문임을 밝힌바 있다.
"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바깥에 백성만 청군의 약탈로피폐해지는 순간에도 명나라를 향해 제를 올리는 인조의 모습이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에서 묘사된다. 청에 철저히 패했음에도 뿌리 깊은 존명의식을 가진 조선에게 그당시 국제통상의 중심으로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청나라는 배울 것이라곤 없는 오랑캐의 나라일뿐이였다. 이런 뿌리깊은 멸시는 청나라로 끌려간 수많은 아녀자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구사일생 돌아온 그녀들은 일종의 환향녀 즉 화냥녀로 취급되어, 성리학이 획일적으로 요구하던 사회질서 속에 숨통을 못찾고 멸시되거나 자살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의 비극은 사림파정치로 인한 국세의 미약함에 원인이 있는데 애꿎은 부녀자들이 그 피해를 감당해야하는 사회시스템이었다.
노론의 등장
소현세자의 죽음은 훗날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을 일으키며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으로 불리는 자의대비가 상복을 어떻게 얼마나 입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은 당파싸움의 폐단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로 보면 예송논쟁은 대단히 중요한 정치투쟁이었다. 바로 인조를 이은 효종 그리고 현종, 숙종의 정통성과 관련한 문제였기때문이다. 이 쟁투의 주연은 노론의 거두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기호학파들에게는 위대한 유학자였지만, 영남과 호남의 유림들에게는 악마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영호남의 선비들은 대문 앞에 송시열의 이름을 그려놓고 밟고 다녔다고 한다.
인조말년에 등장한 노론이 정국을 장악하는 때는 바로 영조 때이니 이미 사도세자의 비극이 잉태되고 있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소론과 님인의 비호를 받았고 노론의 추대로 왕이 된 영조와 노론 입장에서 소론과 친하게 지내는 사도세자는 눈의 가시가 된다. 영리한 왕 영조였지만 태생적으로 무수리의 아들이란 약점과 '경종 독살설'로 인해 괴로움을 겪은 터라 아들이 더 미웠을 것이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갈등사이에서 한탄만 하는 혜경궁 홍씨집안 입장에서도 사도세자의 행각은 마땅치 않았다. 혜경궁 홍씨가 남편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로 사도세자는 사방이 적이었고 아버지 영조 조차 엄하고 무서웠으며 아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도 은폐할 수도 없이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인 영조는 인조처럼 멍청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닺고 호시탐탐 세자를 죽이려는 노른으로 부터 손자를 보호하여 정조가 왕위에 오르게 끔 도와주기때문이다. 그래서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를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애처롭다. 그들이 왕이 아니었으면, 왕의 아들이 아니었으면 손자가 아니었으면 겪지 않을 비참하고 끔찍한 일들이 아니었는가. 노론은 참으로 천하 무적이라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정조 사후 조선 후기의 천재 실학자 정약용을 죽이려다 18년 귀양살이를 시키고 세도정치이후에는 특정 가문만이 권력과 부를 독차지 하는 기형적인 정치를 이루는데 일익을 한다.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은 정조는 임진왜란 때 일상을 기록한 이순신의 문집과 일기를 <난중일기>란 이름으로 편찬한다. 허장성세의 유학자들이 판치는 조선에서 엄격한 현실주의자였던 이순신을 재조명한 것이 바로 개혁군주 정조였다는 점은 일맥 상통하는데가 있다. 신하들이 왕을 압박하는데 사용하던 도덕적 명분론인 < 심경> 강론은 정조 때 줄어들다가, 이후 세도정치하에 왕권이 미미해지자 유명무실해지는데 이는 굳이 명분론 조차 필요없게 되어 권력층의 야욕이 노골화되기때문이다.
조선이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병자호란이 1636년, 조선이 받들던 황제의 나라 명이 멸망한 해가 1644년.박지원의<열하일기> 서두에 보면 연암선생이 청으로의 길을 떠났던 1780년까지 우리네 양반들은 명의 연호를 사용했다한다.
중국에서는 송대이학에서 심학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별로 중시되지 않았던 <심경> 이 조선에서 중시된 것은 이러한 조선의 정치와 관련된다. 겉으로는 도덕군자가 다스리는 철인정치를 표방한 학문은 곧 자신들만의 이기적이고 현세적 목적에 이용되어 버렸을 뿐으로 국가와 백성보다는 오직 가문과 당파만을 위해 산 조선의 선비들에 대해서 지금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친구란 무엇인가
<추노>는 소현세자가 죽고 그 아들들을 귀양보낸 권력자들과 소현세자의 아들을 옹립하려는 반정세력과의 긴장된 정국을 배경으로 한다.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를 죽이는 피비린내나는 이 시대는
양반과 노비, 그리고 명분과 실리의 불꽃 튀는 싸움이 있다. 명분과 실리는 양반과 양반사이에서도 노비와 노비사이에서도 발생한다.
<추노>의 최고 악역은 사실 인조와 인조의 오른팔이 되어 권모술수를 일삼는 좌의정 이경식 같은 지능형 악인들이지만 실제 살인을 담당하는 이경식의 사위인 황철웅은 미워하기 어려운 입체적인 악역이다. 황철웅은 송태하와 동문수학해 나란히 무과에 합격하고 함께 훈련원에 들어갔으나, 늘 태하의 그늘에 가려 2인자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살려준 태하를 진실된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송태하가 세자가 청군에 볼모로 잡히는 순간 청군 진영을 향해 돌진할때, 송태하를 따르지 않고 배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예심이 모든 것인 태하에 비해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아온 황철웅의 세계는 여기서 균열이 일어난다. 그에게는 돌봐야할 어머니가 있으니 죽을 수가 없었고 그것을 강요하는 친구가 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언젠가 죽으니, 명예롭게 죽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송태하는 친구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 열망이 욕망으로 변하지 않는 경우를 보지 못하였느니라'
명분과 실리
10회에서 원손을 죽이기 위한 결투에서 태하는 철웅을 아직도 친구로 여긴다. 그래서 그를 죽이지 않고 가버린다. 하지만 철웅은 태하가 매사 잘난척하는 녀석이라 죽이고 싶다고 한다. 단순히 태하가 공부며 능력이며 모든 면에서 앞서서 그런 것일까. 단순히 질투심에서 친구를 배신할 철웅은 아니다. 만일 그에게 돌봐야할 노모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가난한 삶 속에서 자나깨나 자식 걱정만 하는 어머니를 두고는 목숨을 버릴 수 없는 그는 원래부터 악인은 아니었다. 당파끼리 모여 논공행상을 하며 권력과 부를 나눠먹는 시대 . 마땅한 연줄도 없이 가난한 무인으로 살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그는 오기로 살았으며 더 악랄해야지만 성공할 수 있었다. 뇌성마비인 처와 그를 이용하는 장인의 이중적인 태도로 그는 송태하가 자신을 2인자로 명령하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장인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점점 광폭해진다.
그는 바닷가 절벽에서 송태하와의 결전에서 패한 후 관군이 도착하였을 때 다친 몸이지만 관군 모두를 몰살한다. 물론 원손을 아무도 모르게 처단해야하는 상황이라 그랬을 것이지만 그 행위로 인해 송태하는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권력을 위해 장인의 꼭두각시가 된 그이지만 암살 명령에 감옥에 갇히면서까지 저항한 그다. 결국 그가 걱정되 찾아온 노모를 보고 무너지게 되지만 말이다. 실리를 위해 아니 어머니를 위해 명분과 의리를 버리는 그의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니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좌의정의 뇌성마비 여식으로 온전히 말도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해 오욕의 삶을 사는 아내, 그는 아내의 걱정에 항상 냉담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눈도 마주 보지 않고 아내가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손으로 겨우 쓴 글도 '못알아보겠다'고 던진다. 장인은 그를 항상 이용하기만 하지만 아내는 착한 사람, 차갑게 대하지만 아내를 보는 눈은 그렇지 않다.
천지호 일당까지 죽여버린 황철웅의 폭주로 천지호는 황철웅을 죽이기위해 담장을 넘는다.
황철웅의 아내에게 남편의 거취를 묻는 천지호. 황철웅의 아내는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고 말한다.
그 아내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천지호의 말.
" 부인을 보니 부인을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황철웅한테 복수가 될 거 같네요. 마님 오래~~사세요~"
저번 주 방송분에서 송태하와 대길이 좌의정한테 잡히고 원손은 언년이가 데리고 도망다니고 있다.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송태하와 대길의 대화는 그들의 실리주의와 명분론를 대변한다.
언년이를 지킬 의지도 없이 무슨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느냐는 대길의 일갈에 태하는 대답한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다만 죽을 때를 선택할 수 없을 뿐이지..."
대길은 죽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응수한다.
"사람은 모두 지키고 싶은게 하나는 있는 법이거든. 어떻게든 살아남아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
바로 이런 이유로 뿌리 깊은 사대부로 노비가 되어서도 조선의 시스템에서 일탈하지 못하는 송태하 보다 황철웅과 대길에게 마음이 간다. 하지만 드라마가 나라에 충성하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조가 높은 무장, 송태하를 하찮게 그리면 안될 것이다. 드라마는 영화처럼 냉소적이고 삐딱해서는 안된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보기 땜시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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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원 카메라는 dslr 효과를 가진 카메ㅏ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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