逍遙
무서록, 문장강화/이태준 본문
이태준의 <문장강화>는 고전적 노작이 되었으나 아직도 작문에 관한한 필독서로 빛이 바래지 않을 정도로 작자 특유의 간결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풍부한 예문이 특징이다.
<문장강화>는 우리집에 2권이 있는데 하나는 내가 산 것,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산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이렇듯 똑같은 책을 사는 경우가 있었는데, 어린 소녀 소피의 관점으로 철학을 쉽게 해설한 <소피의 선택>이 그랬고, 그리시안의 <삶의 지혜>라는 책이 그랬다.
정지용과 쌍벽을 이루던 이 문장가의 산문집 <무서록>은 하나의 주제에 짧은 단상과 단일한 표현을 써서 운문처럼 느낄 정도의 문장으로 써나간 것으로 그의 이론이 체화되어있다.
무엇이든 버리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글도 그렇다. 여러가지 표현은 처음엔 그럴듯해서 다 소유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한대상을 바라보는 여러시각이 존재하듯 여러표현이 있는데 무엇이 더 적절할지 항상 선택의 문제가 된다.
마치 아이팟을 보듯 미니멀리즘한 디자인이라는 것이 각광을 받는 시대다. 특히 인터넷 상에서의 글쓰기란 것이 페이징이 아닌 스크롤에 의한 글읽기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태준의 글은 나로 하여금 버리는 것에 대해 상념에 빠지게 만든다.
산은 슬프다. (중략)
하늘을 덮은 옹올한 원생림 속에서 저희끼리만 뜻있는 새소리도 길손의 마음에는 슬픈 소리요 바위틈에 스며 흘러 한 방울 두 방울 지적거리는 샘물 소리도 혼자 쉬이며 듣기에는 눈물이었다. 더구나 산마루에 올라 천애에 아득한 산갈피들이며 어웅한 벼랑 밑에 시퍼런 강물이 휘돌아 가는 것을 볼 때 나는 어리었으나 길손의 슬픔에 사무쳐보았다. (중략)
산, 그는 산에만 있지 않았다. 평지에도 도시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나를 가끔 외롭게 하고 슬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산이었다.
사람들에게 산은 무엇일까. 아니 범위를 국한해 나에게는 산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나에게 산은 아름답고 흉폭한 이중적인 존재일지라도, 도심속에 야생과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허파같은 존재로만 생각되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강원도 철원 용담이란 촌에서 출생, 어릴적 부터 호자 산넘어 물이요 물건너 산인 산혐길을 걷고, 큰 영을 수없이 넘어본 상허 이태준에게 산은 슬프고 무섭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운 강원도 소년은 공부를 잘해 전교 1등을 해도, 다른 친구들 처럼 상급학교에 가기 어려웠다. 그는 고아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기약없는 망명객으로 블라도 보스톡에 연적 하나만을 유품으로 남기고 돌아가셨고 어머니 마저 아홉살 철부지때 그의 곁을 떠났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희미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이 나오지 않던 그는 우등상을 타고 자랑할 어머니가 없음에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결국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다른 친구들이 학교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싫어 잘되어 보려고 고향을 뒤로 하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던 것이다. 의지할 에 없는 어린 소년에게 평지인 도시가 어떤 곳이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고요한 밤 산가에 일어나 앉아 말이 없네
쓸쓸하고 적막한 것이 본래 자연의 모습이러니
얼마나 쓸쓸한가!
무섭긴들 한가!
무섭더라도 우리는 결국 이 요요적적에 돌아가야 할 것 아닌가!
고인과 고락을 같이 한 것이 어찌 내 선친의 한개 문방구뿐이리오, 나는 차츰 모든 옛 사람들 물건을 존경하게 되었다. '휘트먼'의 노래에 "오 아름다운 여인이여 늙은 여인이요!" 한 구절이 가끔 떠오르거니와 찻종 하나, 술병 하나라도 그 모서리가 트고, 금간 데마다 배이고 번진 옛사람들의 생활의 때는 늙은 여인의 주름살보다는 오히려 황혼과 같은 아름다운 색조가 떠오르는 것이다.
고전 정신의 대도는 영원히 온고지신에 있겠으나 고적의 육체미는 반드시 지식욕으로만 감촉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모든 고전의 고전미는 고완의 일면을 지님에 엄연하도다. (중략)
"달아 어서 높이 높이 올라 떠서 어떤 깊은 골짜기든 다 환하게 비치어라, 우리 낭군 돌아오시는 밤길이 어둡지 않아 발도 상하심 없이 한시라도 빨리 오시게 ....... ."
고려청자나 정읍사에서 그들의 고령미를 떼어버린다면 무엇이 그다지 아름다울 것인가.
"달아 높이곰 돋아사...... ."
한마디에 백제가 풍기고, 여러 세세대대 정한인들의 심경이 전해오고, 아득한 태고가 깃들임에서 우리의 입술은 이 노래를 불러 향기로울 수 있도다.
고령자의 앞에 겸손은 예의라 자기 하나에도, 가요 하나에도 옛 것일진대 우리는 먼 앞에서부터 옷깃을 여며야 하리로다. 자동차를 몰아 '호텔'로 가듯 그것이 아니라 죽장망혜로 산사를 찾아가는 심경이 아니고는 고전은 언제든지 써늘한 형해일뿐, 그의 따스한 심장이 뛰어주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느끼기 전에 해석부터 가지려 함은 고전에의 틈입자를 면하지 못하리니 고전의 고전다운 맛은 알바이 아니요 먼저 느낄 바로라 생각한다.
고완에 대한 애호가 드러나는 내용과 미려한 그의 문체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갑위의 놓인 조선조 때 제기하나를 표현할 수사에 힘들어한다.
고려 자기 같은 비취빛를 엷게 띠었는데 그 맑음, 담수에서 자란 고기 같고 그 넓음, 하늘이 온통 내려 앉아도 능히 다 담을 듯싶다. 그리고 고요하다.
가끔 옆에서 묻는 이가 있다. 그 그릇이 어디가 그리 좋으냐는 것이다. 나는 더러 지금 쓴 것과 같이 수사에 힘들여 설명해 본다. 해보면 번번이 안 하니만 못하게 부족하다. 내가 이 제기에 가진 정말 좋음을 십분지 일도 건드려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선승들의 불립문자설(도란 문자나 말과 같은 표면적인 것에 매이지 않고 ,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 이심전심과 같다)에 더욱 일깨워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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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을 전공하고, 드라마트루기를 공부하고, 서사학으로 논문을 쓰고, 논술까지 가르쳐온 입장에서
인터넷 글쓰기에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아니 어쩜 드라마 투루기에서부터 지속되어온 문제이기도 하다. 유년기 러시아 문학과 독일 문학을 꽤나 좋아한 내가 읽은 책들은 간결한 문어체 였다. 하지만 내가 배운 희곡과 드라마의 대화체는 구어체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내가 쓰는 기서결이 분명한 문어체를 뜯어고쳐야만했다. 하지만 전문용어를 팍팍 써까며, 적확하게 쓰는 문어체는 논문을 쓸 때 무척이나 유용한 문체다. 그러나 온라인 상의 글은 구어체와 문어체의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싱가폴에 살 때 아이들은 '싱가포르'라고 말하는 나의 발음을 대놓고 비웃을 때가 있었다. 그렇다 '싱가폴'이 맞다. 머리가 빠지는 영어스트레스를 이기고 쌓은 영어 발음에 대한 위세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한국어 표준 발음은 '싱가포르'다. 나는 어찌 발음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많은 비문과 표준어가 아닌 구어체를 쓰는 인터넷 글쓰기는 결국 현사회의 언중들의 표현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 말이 쓰이는 시간 그 장소에서 쓰이는 말들이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외래어 표기또한 낯선 것들이 많은 혼란한 언어 환경..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말은 원리원칙대로 할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것. 마음을 생각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파격적인 표현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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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강화>같은 수사학 책을 쓴 이태준 조차
十分心思一分語(마음에 품은 뜻은 많으나 말로는 그 십분의 일밖에 표현못한다)
같은 말을 하다니, 말이란 그저 마음에 품은 생각을 해석할 뿐이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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