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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에비에이터>의 하워드 휴즈, 가장 기이한 필름메이커

bakingbook 2005. 10. 24. 17:38

영화: 에비에이터
장르: 애정 로맨스
개봉: 2005.2.18
감독: 마틴스콜세지
출연: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하워드 휴즈), 케이트 블란쳇(캐서린 햅번), 케이트 베킨세일(에바 가드너)
줄거리:

조각같이 아름다운 외모, 총명한 두뇌, 그리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으로 20세의 나이에 억만장자가 된 하워드 휴즈. 그러나 그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부른 영역에 자신의 야망을 건다.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영화. 기라성같은 할리웃 제작자들의 비웃음과 영화계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2년의 촬영기간, 1년의 후반작업 기간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본과 제작공정 끝에 <지옥의 천사들>을 발표한다. 그리고 할리웃의 모든 흥행 역사를 갈아치운다. 세상의 감탄, 그러나 놀라움은 출발에 불과했다! ‘영화계의 마이다스’로 떠오른 하워드 휴즈는 당대 최고의 섹스심벌로 추앙받는 여배우들을 차례로 발굴해낸다. 그리고 그녀들은 금새 하워드 휴즈의 매력에 사로잡혀 연인이 돼버린다. 진 할로우, 캐서린 헵번, 에바 가드너... 서로 다른 매력의 여배우들이 그의 주변에서 맴돌고 각종 잡지와 매스컴의 표적이 된 휴즈. 그러나 사랑에 머무르기엔 그의 야망은 너무 거대했다!
어려서부터 비행기 조종 취미를 가졌던 하워드는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모아 새로운 비행기들을 생산해낸다. 마침내 세계 비행기록을 경신하며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남자’의 타이틀을 얻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가장 긴 날개를 가진 비행기로 기록되는 ‘헤라클레스’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사중 하나인 TWA 항공을 인수하며 세계 굴지의 항공재벌이 되지만... 생각지 못했던 음모와 시련이 그를 괴롭힌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그의 내면의 비밀이 서서히 베일을 벗는데...

 

지금으로부터 9년 전, <타이타닉>을 촬영하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우연히 하워드 휴스의 전기를 손에 넣었다. 스무살도 되기 전에 억만장자가 된 하워드 휴스는 엄청난 재산을 영화와 비행기에 쏟아부었고, 아름다운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리며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세균 공포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세상과 격리돼 쓸쓸하게 죽어간 비운의 인물. 그는 영양실조와 약물중독과 욕창에 시달리던 말년에, 손톱을 길게 기르고 티슈 통을 신발처럼 신은 기괴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디카프리오는 20세기의 그로테스크한 전설로 남은 휴스에 관한 다른 전기들을 구해 읽으면서, ‘자기중심적이고 타락한 백만장자’부터 ‘수줍은 천재이자 거부할 수 없는 매력남’까지, 그에 대한 평가가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다는 사실에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모든 ‘증언’들을 퍼즐처럼 조합해 히워드 휴스라는 난해한 초상화를 완성한 디카프리오는 그의 입체적인 삶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런 디카프리오의 뜻에 처음 맞장구를 친 이는 마이클 만이었지만, <알리>를 마치고 또 한편의 전기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렇다면 대안은 하나, <갱스 오브 뉴욕>으로 이미 호흡을 맞췄던, 그리고 미국의 영화사와 현대사에 정통한 마틴 스코시즈뿐이었다.

디카프리오, 스코시즈를 끌어들이다

마틴 스코시즈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이들을 ‘환상의 콤비’라고 부르기는 아직 이르지만, 20세기의 전설이자 신화로 남은, 미국 산업계의 거물을 영화화하는 데 더없는 적임자들로 보인다. 비록 스코시즈 자신이 품어온 기획은 아니었지만, 자기 자신의 사소한 결함에 굴복해 쓰러지는 남자는 그가 진한 애착을 느끼는 캐릭터 중 하나였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나 <분노의 주먹>의 라모타처럼 자신의 결함 혹은 악마성 때문에 지옥으로 추락하고 마는 남자들. 뿐만 아니라 폭력(<스카페이스>)과 외설(<무법자>)의 문제작들로 검열기관을 긴장시키고, 캐서린 헵번과 에바 가드너 같은 당대의 스타들과 사귀었던 영화사의 ‘스캔들메이커’를 통해, ‘클래식 할리우드’에 대한 그의 무한한 애정을 과시할 수도 있었다. 영화에 관한 영화,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도, 평생 폭력과 구원을 노래한 거장의 구미를 당길 만했다. 스코시즈가 이 작품을 연출하는 데 결격 사유가 있다면, 그 자신은 소문난 비행 공포증 환자라는 사실 정도. 그러나 스코시즈의 항변처럼, 그가 권투를 잘 알거나 좋아해서 <분노의 주먹>을 만들진 않았듯, 비행이 두렵다고 ‘비행사’에 관한 영화 <애비에이터>를 포기할 리도 없었다. 디카프리오도 좋은 카드였다. 그 옛날의 하워드 휴스를 “빌 게이츠와 제리 브룩하이머 등을 섞어놓은 것 같은 인물”(<타임>)이라고 소개해야 겨우 감을 잡을 요즘 세대가, 기꺼이 주목하고 설득당할 만한 배우, 그가 디카프리오니까.

 

1926년 첫 번째 제작 영화 <스웰 호건 Swell Hogan>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 하워드는 향후 30년 동안 영화제작 부문에서 자신의 ‘충복’이 될 노아 디트리히(영화 속에서 존 C. 라일리가 연기)를 고용함과 동시에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을 기용, 어드벤처 영화 <투 아라비안 나이트 Two Arabian Nights>(1927)를 제작한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감독상과 코미디 영화상을 수상하며 독립제작자로서의 하워드 휴즈의 이름을 각인시킨다.

그러나 이 시기 하워드 휴즈의 가장 거대한 프로젝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공군의 활약상을 다룬 <지옥의 천사들 Hell’s Angels>(1930)이었다. 휴즈는 1920년대 후반 내내 이 영화작업에 매진했으며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까지 겸했다. 87대의 전투기를 구입하고 에이스 파일럿들을 고용했으며 비행교습을 받고 파일럿 라이센스까지 취득한 휴즈는 직접 스턴트를 하기도 했는데 정찰기가 추락하여 광대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광적인 집착이 완성의 결실을 맺게 될 무렵에는 당시로서 최신 기술인 사운드가 도입됨에 따라 영화를 전부 다시 찍는 믿기 힘든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때까지 최고의 제작비 3백8십만 달러가 투여된 이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나 결과적으로는 1백5십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신인급이었던 진 할로우는 이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할리우드 섹시 블론드 계보의 출발을 알린다.

불가능한 도전에 다름 아니었던 <지옥의 천사들> 외에 독립제작자로서 휴즈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검열과의 충돌을 일으킨 두 편의 영화 때문이었다. 1932년에 상영된 갱스터 영화의 고전 <스카페이스 Scarface>는 폭력적인 묘사, 남매간의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분위기 때문에 엄격한 제작 규약(Production Code. 윌 헤이스의 주도로 제정된 이 규약은 그의 이름을 따서 헤이스 규약(Hays Code)이라고도 불렸다)과 맞부딪혔다.

또 한 편의 작품은 <스카페이스> 이후 근 10년 만에 제작, 감독한 <무법자 The Outlaw>(1943)였다. 1930년대 내내 영화제작자로서 보다는 비행가로서의 삶에 더 열정을 쏟았던 휴즈가 단골 치과의 접수원이었던 제인 러셀을 발굴하여 캐스팅한 이 영화는 본편 영화와 광고에서 그녀의 가슴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검열과 충돌했다. 휴즈와 그의 비행기 엔지니어들은 제인 러셀의 가슴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하프 컵 브라를 새로이 고안해내는 노력(?)을 경주하기도 했으며 이것은 1950년대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상품이 되기도 했다(그러나 정작 제인 러셀은 이것을 착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워드 휴즈는 지지 않았다. 그는 검열에 맞서 정면으로 도전했으며 <무법자>는 헤이스 규약을 무시했던 최초의 미국 영화가 되었다(헤이스 규약 시대에 <무법자> 외에 검열에 도전한 영화는 ‘처녀(virgin)’, ‘정부(mistress)’라는 말을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오토 프레밍거의 1953년 작 <우울한 달 The Moon Is Blue> 정도이다). 검열과의 오랜 싸움 끝에 <무법자>는 1943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제한 개봉 이후 4년이 지난 1947년이 되어서야 미국 전역에서 상영할 수 있었다.

 


영화제작자로서 하워드 휴즈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은 1948년 메이저 영화사 RKO를 인수했을 때이다. 그러나 이 때부터 그가 영화제작에서 손을 떼는 1957년까지의 시기는 그에게 있어 영광보다는 오욕의 세월이었다. 그가 RKO를 인수하기 직전의 경영자는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던 도어 셰리였다. 그는 전후 미국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반유태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범죄 스릴러 <집중포화 Crossfire>(1947)를 제작했으며 <과거로부터 Out of the Past>, <그들은 밤에 산다 They Live by Night> 등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늘을 묘사한 누아르 장르에서 특출난 재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광신적인 반공 매카시즘이 발흥하던 이 시기 그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 HUAC)로부터 좌파 성향을 의심받고 있었다.

도어 셰리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 수정헌법 제1조를 거론하면서 RKO는 공산주의자나 그 동조자를 고용한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HUAC가 이른바 할리우드 텐(Hollywood Ten. 시나리오 작가 링 라드너 주니어, 애드리언 스코트, 달튼 트럼보, 감독 에드워드 드미트릭 등 HUAC의 조사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한 비협조적 증인들)에 대해 가혹하게 취급하면서 사태는 악화되었다. RKO 이사회는 이에 발맞춰 스코트와 드미트릭을 즉시 해고했다.

하워드 휴즈가 RKO를 인수했던 것은 바로 이 때였다. 1948년 5월 그는 취임과 동시에 RKO 직원 중 좌파 인사나 그 동조자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는 기존에 제작되고 있었던 모든 영화에 관여하면서, 특히 도어 셰리 체제에서 진행중이었던 좌파 성향의 조셉 로지 감독이 연출한 어두운 전쟁 고아 이야기 <녹색 머리 소년 The Boy with Green Hair>을 전면적으로 뜯어 고쳤다. 10개월 간 제작이 지연되고 재촬영을 거치는 과정에서 조셉 로지는 창작자로서의 모든 자유를 저당잡혔고 향후 RKO에서 제작하기로 되어 있었던 프로젝트는 전부 무산되었다. 결국 HUAC의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로지 감독은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 시기는 또한 메이저 영화사가 제작-배급-상영을 모두 관리하는, 이른바 수직통합 체제가 무너진 시기이기도 했다. 미 대법원은 역사적인 파라마운트 판결을 통해 메이저 영화사의 독과점을 금지시켰으며 하워드 휴즈는 이에 적극 협조했다. 그러나 MGM의 거물 제작자 루이스 B. 메이어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도어 셰리는 이에 반대했으며 둘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휴즈와 같이 일할 수 없다고 느낀 셰리는 MGM으로 이전했다. 셰리가 심혈을 기울여 왔던 2차 대전 서사극 <전장 Battleground>을 휴즈가 제작할 의사가 없었다는 점도 결별의 한 이유가 되었다. <전장>은 1949년 MGM에서 제작되었다.

셰리 체제의 종말과 함께 하워드 휴즈의 RKO 시대는 약 10년간 지속되었지만 화려했던 메이저 스튜디오로서의 명성은 온데 간데 없었다. 과거 <시민 케인 Citizen Kane>, <킹 콩 King Kong>,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의 뮤지컬 걸작들을 양산했던 이 영화사는 급속한 쇠퇴일로를 걸었다. 휴즈는 1949년 명백한 HUAC 동조 영화 <13부두의 여인 Woman on Pier 13>(<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I Married a Communist>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음)을 제작했으며, 1951년에는 100명에 가까운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해고시킨다는 명분으로 RKO를 임시 폐쇄하기도 했다.

1954년 휴즈는 2,350만 달러에 RKO 주식 전량을 매입, 미국영화사상 최초로 메이저 스튜디오를 단독 소유한 인물이 되었지만 이듬해 RKO 영화에 대한 TV 방영권을 제너럴 타이어 사에 넘기면서 사실상 RKO 시대의 종말을 가져왔다. 그가 10년 동안 제작한 영화들도 영화사의 걸작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제인 러셀을 앞세운 <라스 베가스 스토리 The Las Vegas Story>(1952), <마카오 Macao>(1952) 등의 영화는 그저 그런 성적과 평가를 받았고 영화 제작자로서의 말년을 대표하는 칭기즈칸 서사극 <정복자 The Conqueror>는 6백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였지만 미국 내에서 450만 달러를 회수하는데 그쳤다. 비행가로서의 자신의 야망이 반영된 영화 <제트 파일럿 Jet Pilot> 역시 제작된 지 7년만인 1957년 개봉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30년 간 같이 해온 노아 디트리히를 해고했으며, 그의 퇴장과 동시에 하워드 휴즈의 영화 인생은 막을 내렸다.

 


영화 인생의 종말과 함께 하워드 휴즈의 화려했던 시대도 지나가고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있어왔던 강박증은 더 심해졌고, 전염병으로 사망한 어머니의 기억은 세균감염에 대한 그의 공포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머리를 깎지 않고 손톱을 기르며 화장지 박스를 구두처럼 신고 다니고 병 속에 소변을 보관하는 기행이 루머처럼 떠돌았다.

사망할 때까지 근 20년 동안 그는 은둔자로서 생활했지만 여전히 미국 정치권력과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매카시즘 당시 ‘빨갱이 사냥’에 앞장 섰던 리차드 닉슨과의 인연은 특히 각별했는데, 휴즈의 수하였던 로버트 마휴는 닉슨이 부통령으로서 CIA의 카스트로 축출 작전을 계획할 때 그 작전에 깊숙히 관여했다. 닉슨은 또한 자신의 형이 휴즈에게서 빌린 대부금을 갚지 않은 것을 존 F.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폭로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고, 1960년 대선에서 낙마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1968년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이후 휴즈와 마휴가 워싱턴 행정부와의 긴밀한 연계를 위해 고용한 래리 오브라이언은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 부하들로부터 도청을 당한 장본인이었으며, 휴즈가 건설한 텍사스 극장은 1963년 당시 존 F. 케네디의 암살범으로 지목되었던 리 하비 오스왈드가 체포되었던 극장이었다.

 

하워드 휴즈는 생전 세 명의 여인과 정식으로 결혼했다. 1929년 <지옥의 천사들>에 몰입해 있을 당시 엘라 라이스와 이혼했으며 1957년 여배우 진 피터스와 결혼했으나 은둔자로서의 말로를 걷고 있던 1971년 이혼했다. 세 번째 부인인 여배우 테리 무어와의 결혼 생활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이르는 시기 휴즈는 캐서린 헵번, 에바 가드너, 베티 데이비스, 수잔 헤이워드, 진 할로우, 라나 터너 등의 여배우들과 숱한 염문을 뿌렸지만 거부의 호색 취미 그 이상의 관계는 아니었다.

이 호텔, 저 호텔을 전전하며, 자신을 쫓아내려고 했던 데저트 인 호텔을 통째로 사버리기도 하는 괴팍함을 과시했던 휴즈는 1976년 4월 광적인 비행가답게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망하기 전 20년 동안 언론과 사진 등에 전혀 노출된 적 없는 그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의료진은 지문 검식까지 해야만 했다. 하워드 휴즈는 텍사스 주 휴스턴 글렌우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미국 최초 억만장자의 최후 치고는 결코 화려하지 않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