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가 개봉되었던게 작년 가을이었지요. 그때 극장에서 보고 바로 감상을 올리려고 했는데 바쁘다보니 결국 dvd가 출시된 지금까지 미뤄지고야 말았습니다.
이 영화는 물론 1999년에 제작된 'Elizabeth'의 속편입니다. 감독도 동일하고 케이트 블란쳇이 다시 엘리자베스 역을 맡았습니다. 전편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제프리 러시 역시 프란시스 월싱험 경으로 돌아왔습니다.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느꼈던 점은 마케팅이 완전히 실패였다는 겁니다. 개봉하기 전부터 제작사에서 이 영화를 완전히 전쟁 서사극으로 선전했는데, 영화에는 사실 전쟁 장면은 거의 없습니다. 영화 대부분은 여왕이자 인간으로서의 엘리자베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그러니 광고만 보고 전쟁 장면을 기대하고 간 관객들이 실망할 수 밖에요.
거의 10년 전에 만들어진 전편은 사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들 중 하나입니다. 당시 국제 정세와 함께 잉글랜드의 정치적 분열을 긴장감 있게 그려내었고, 엘리자베스가 미약한 기반에서 시작해서 정적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까지의 과정을 긴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지요. 조연들의 연기도 훌륭했습니다.
전편과 비교했을 때 이번 속편은 약간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분위기가 전편보다 많이 가벼워졌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등장인물들도 전편에 비하면 무게가 좀 떨어진다는 느낌입니다. 극의 전개도 전편에 비하면 너무 느슨합니다. 액션 장면 하나 없이도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했던 전편에 비하면 조금 지루해진 편이지요. 속편의 갈등관계는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대립,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와의 대립이 주를 이루지만 전편에 비해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여왕의 사생활 부분도 정치적 알력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었던 전편에 비교하면 좀 따로 노는 느낌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
펠리페 2세
프란시스 월싱험 경
이상 대략의 등장인물들입니다. 사진은 빼먹었지만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도 상당히 비중 있게 등장합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등장인물들의 묘사와 함께 의상이나 모든 면에서 시대적 고증은 뛰어난 편입니다. 앞에서는 전작에 비해 떨어진다고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전작과 비교해서'입니다. 영화적 완성도는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스페인 무적함대는 이렇게 멋진 비주얼과 함께 등장하지만 실질적인 전투장면은 앞서 말했듯이 거의 없습니다. 전작에서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은 들판에 널린 시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내버렸죠. 엘리자베스 시리즈의 재미는 결코 액션이나 전쟁에 있지 않습니다.
영화의 단점을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면, 스페인에 대한 지나치게 부정적인 묘사를 들 수 있겠습니다. 당시 카톨릭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대결은 종교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지나치게 종교적 의미로만 가지고 가는 것은 좀 그렇더군요. 스페인의 잉글랜드 침공도 단순히 잉글랜드가 프로테스탄트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의 반란을 지원했기 때문이 더 컸습니다. 펠리페 2세도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단순히 광적인 카톨릭 교도는 아니었구요.
그 외에도 영화가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서 역사적 사실을 변형시킨 것은 꽤 있습니다. 몇가지 들자면..
1. 초반에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스웨덴 왕이나, 러시아의 이반 뇌제나 오스트리아 공 등이 구혼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나 이것은 엘리자베스의 즉위 초반에 있었던 일입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전작에 나왔어야 하는 것이죠. 이 영화가 묘사하는 시기에 엘리자베스의 나이는 52세였습니다.
2. 영화에서 펠리페 2세는 이상하게 뒤뚱거리면서 걷는데, 실제의 그는 그런 버릇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3. 프란시스 월싱험 경의 동생은 없었습니다-_-;
4. 이 시기에 여왕의 총신들 중에는 전작에 등장했던 로버트 더들리 경이나 윌리엄 세실 경도 있었습니다만 영화에는 나오지 않더군요.
5.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암살 시도였던 '배빙턴의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암살자가 여왕에게 권총을 들이댄 일은 없었습니다.
6. 월터 롤리 경(라일리는 무슨..-_-; 제발 자격 있는 번역가 좀 씁시다.)은 유명한 탐험가로 미국 곳곳의 지명이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르마다와의 해전에 참가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스페인의 침공시 그는 육군의 지휘를 맡고 있었습니다.(참고로 그는 이후 제임스 1세에 의해 참수되었습니다.)
7. 아르마다는 화공선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화공선은 단지 무적함대의 대형을 흐트러 놓았을 뿐이었지요. 이후의 칼레 해전에서도 스페인 함대는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무적함대를 완전히 격파한 것은 북해의 폭풍이었습니다.
8. 영화에서는 아르마다의 패전과 함께 스페인의 쇠퇴가 시작된 것처럼 묘사했고, 실의에 찬 펠리페 2세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스페인은 실제로 신속하게 함대를 재건했습니다. 스페인은 1648년까지는 유럽의 최강국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이상 아는대로 적어보았는데, 그래도 최근의 국내 사극들처럼 역사를 개념없이 왜곡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어쨌든, 16세기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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