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홀트 메스너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의 8000미터급 14좌를 완등하고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등정을 한 살아있는 신화다 1970년 낭가파르바트 루팔벽 초등정에서 동생을 잃은후 16년에 걸쳐 이룬 업적이었다. 그의 산행방식은 대규모 원정대 등반을 하는 헤르리히코퍼와는 대조적인 방식이었다. 원정대에 의존하지 않고 한두명이 직접 장비를 메고 올라가는 알파인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성공한 뒤에도 찬사와 비난이 엇갈렸다. <벌거벗은 산>은 동생을 잃은 30년후 생과 사의 갈림길 그리고 운명의 갈림길에 대한 기록이다.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이 산괴는 카일라스 산맥과 마나는 인더스 상류 지점에서 끝난다. 그리고 남쪽을 향해 볼 때 산의 오른쪽 끝은 인도양에서 2000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헤르만 섀퍼)
낭가의 산봉우리는 반짝이는 만년설로 뒤덮여 있고, 산등성이와 측면의 산허리는 얼음에 잠겨 있다. 산기슭에느 고원의 목장지대와 거대한 삼림이 펼쳐져 있으며 그 상부에서 아래로 빙하가 이어지고 있다. 삼림은 하부에서 갑자기 멈추고 식물은 보잘것없이 드문드문 자라 있다. 이 지대는 덥고 건조하며, 인공 관개시설을 갖춘 작은 마을들이 몇 개 있을 뿐이다. 모든 생명체는 더위에 숨이 끊어질 지경이며, 최하부 지점인 1500미터 부근 인더스 강까지는 끔찍한 황야지대다.
이산은 반세기 동안 독일등반가들의 성배였다. 낭가바르트는 8000 m급의 만만한 산으로 보이나, 험 준한 버트리스 단층애 현수빙하를 거느린 엄청난 급경사로 섣불리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벽이며, 설사 올랐다 해도 비참한 운명을 가져다 주는 불길한 산이었다. 산이 비정할 수록 산은 신이 되어 갔고 도전하는 이들은 거인이 되어갔다. 낭가파르바트를 등반한다는 것은 불굴의 도전, 죽음까지 같이 가는 의리, 함께 목숨을 거는 자일 파트너의 동지애와 동의어였다.
독일등반대의 대 참사...그중 빌리 메르클의 죽음에 이복 동생인 마리아 헤르리히코퍼는 형의 유지를 받들어 그 이상을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똑같은 꿈을 가진 등반대 기사단이 연이어 성배인 낭가바르트 남벽을 향해 출발한다. 이 '산의 왕'은 등반가들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헤르히코퍼에게는 사명이었으며 젊은 등반가들에게는 명예와 꿈과 오만을 위해 꼭 필요한 산이었다. 그중에 라인홀트 메스너와 그의 동생 권터도 있었다. 권터는 단독등반을 놓고 원정대장과 갈등이 생겼을 때 형을 따른다. 그리고 디아미르 측벽 기슭에서 라인홀트는 동생을 잃었다.
슐라긴트바이트가 글로 남긴 저 험준한 벽보다 더 높은 벽이 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대측벽이 거의 수직으로 내리 치닫고 있어서 상부에 눈이 쌓일 수 없기에 저 벽은' 벌거벗고' 있다.
"나의 아우는 죽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꿈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다. "
라인홀트는 권터가 사라진후 완벽하게 혼자 남아 살아남은 자로서 혹독한 고독을 이야기 한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벌거벗은 산에 대한 이야기를...숱한 자기연민의 유혹을 벗어나는 길은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관찰자로서만 가능하다. 그것이 라인홀트가 고통으로 미치지 않는 방법이다. 낭가바르트 ( Nanga Parbat)에서 모든 것이 끝났고 모든 것이 시작된다.
고산등반을 이야기하매 흔히 우리는 에베레스트를 말한다. 하지만 알프스와 히말라야 등반은 다른 전제 조건이 요구된다. 알프스는 순간적인 주의 집중과 순발력이 필요하다면 히말라야는 꾸준히 견뎌내는 지구력과 끊임없는 전투태세를 갖춰야한다. 빌리메르클은 낭가바르트에 대해 성급한 판단을 가지고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산은 영웅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낭가는 그에게 단지 영웅적인 죽음을 위해 존재햇다.
고도 7100m 베이스 캠프에 등반대원들이 고산병으로 죽어간다. 그들은 더 낮은 고도의 베이스 캠프로 하산햬야한다. 그리고 폭풍속에 후두를 다치고, 취사를 하지 못해 굶주린다. 동상과 설맹.. 산은 모든 것을 거부한다. 길은 없다 그저 생존본능만이 꿈틀댈뿐 그러나 그들의 몸은 좀비나 다름없다. 이럴 때는 자기 본존본능이 협동보다 강렬해지고 무질서와 혼란이 생긴다. 거대한 비극들. 동료가 주저앉자마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 로프에 매달려린채 혹은 텐트를 몇발 앞두고 죽는다. 그들의 시체를 넘고 귀환한 동료는 몇명뿐..아무도 다른대원들의 부재를 설명하지 못한다.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가..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다.그리고 원정대장인 빌리매르클과 옆에 끝까지 남아 죽은 셀파는 영웅화 되었다. 하지만 단지 그들을 죽인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려 한 것일뿐.
빌리매르클의 유지를 이상으로 삼은 헤르리히코퍼는 의사였고 이상가 였다.그는 모든이의 우려와 반대에도 끄덕도 하지 않고 광신적으로 일을 추진한다. 그리고 1953년 원정대가 출발한다. 물론 원정대에는 야심가도 같이 한다. 최 고 등반가라는 자부심의28세의 오스트리아 등반가 불 과 유명한 영화감독 한스에르틀. 그는 단독등반에 성공 사지에서 돌아오나, 등반대장인 헤르리히코퍼에겐 배신자일뿐이었다. 공동원정의 실패였으니까.이렇게 원정대는 갈등하며 갈라지게 된다. 야만에서 돌아온 도시에서 그들은 대립한다. 자신의 등반을 깍아내리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헤르리히코퍼의 공세에 대응하던 불은 외부세계와 단절하고 만다. 그리고 1957년 헤르만 불은 초골리사의 빙벽에서 추락한다.
1970년 낭가의 남벽 루팔측벽을 향해 메스너 형제는 헤르리히코퍼등반대를 따라간다. 베이스 캠프에서 정상까지의 고도 4500M 엄청나게 높고 험준하고 황량한 루팔 측벽 전문 등반가가 아닌 원정대장. 산 위로 올라갈수록 열악해지는 스파르타의 삶 권터 형제는 4캠프를 설치하려다 폭풍우를 만나 3 캠프에 남는다. 그러나 형제가 없는 사이 수립된 공격계획은 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원정대장은 군의 지휘관같은 역할을 해야한다. 또한 그는 원정대원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다. 여기서 라인홀트는 헤르리히코퍼의 지도력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원정대는 정상 등반을 하기에는 이미 패색이 짙었다. 메스너와 권터가 단독등반을 떠난후 홀로 돌아온 메스너는 잘못된 선택으로 동생을 사지에 몰았다는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보통 등산 루트와 하산 루트는 동일하다. 무엇보다 올라오면서 구축한 베이스캠프와 자일이 있는 곳이고 훨씬 더 잘아는 곳인 것이다. 메스너와 권터형제는 남면으로 높이 4500미터의 루팔 측면을올라 8125 미터의 정상에 선다. 그런데 하산시 그들이 등정 루트가 아닌 산의 왕이자 가장 험준한 북서면의 디아마르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가지 말을 하고 모든 것의 목격자인 메스너는 침묵한다. 그리고 사실에 대한 왜곡.
모든 것이 끝나고 되돌아 보건데, 결국 순결무구한 낭가의 저주탓인지 원정대 안에서의 사고의 전말과 사실을 왜곡하는 추악한 모습이 드러난다. 동생을 잃은 고통과 세간의 비난에 침묵하던 메스너가 홀로 등정에 나선 것은 이제 더이상 자일로 의지할 동생이 없었던 것도 있겠지만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서가 아니었을까... 시기심 때문에 그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구조신호를 무시한 그 누군가에 의해서말이다. 질투심과 영웅심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물론이다. 다른 이의 공로를 빼앗고 그보다 더한 형제를 앗아가고 무고한 후 그들은 라인홀트에게 말한다.
"더이상 등반은 하지 않는게 좋다고"
그는 잘못된 등반대장을 따라간 후에 잃은 것에 대해 통탄하며 그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낭가 산에 대해 가졌던 형제의 꿈에 대해 괴로워한다. 그렇다. 그때 꿈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헤르히코프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동생을 데려가지 않았다면...이런 가정들은 무의미하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형제가 정상등정을 하기 전 아래 베이스캠프에서 날씨를 알리는 신호탄의 색깔은 왜 바뀐 것일까...그리고 정정할 수 있는 푸른 신호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고산병에 걸린 권터를 위해 위험한 디아마르를 경유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그 누구도 라인홀트를 비난 할 수는 없다. 차라리 그들이 남이었다면 세간에 곡해가 가능할수도 있겠지만.상식적으로 형제를 놓고 공명심을 추구할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바로 옆에서 자일파트너이자 형제인 권터를 잃은 후 온전히 괴로운 사람이 누구겠는가. 최선을 다했음에 산의 신은 구조요청을 묵살했다 아니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살렸다..그것이 산의 자비였을까..형벌이었을까. 그렇게 해서 라인할트도 그 산의 포로가 되어버린다. 그 산은 운명이 된 것이다.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메스너가 그후 완성한 등정들은 영웅심에서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만일 그랬다면 동생의 죽음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메스너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메스너가 낭가바르트에서 잃은 발가락과 손가락을 이야기 하고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 그가 해낸 14좌 완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시초가 된 것은 바로 낭가바르트, <벌거벗은 산>이었다. 그곳에 두고 온 무엇이 있어 그는 그렇게 그곳을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1971년 병원에서 그를 도와준 여인과 다시 낭가바르트의 정상에 선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라인홀트 형제를 시기하던 펠릭스는 1974년 자살한다. 원정대장이었지만 한번도 정상에 오르지는 않은 헤르리히코퍼는 독일에서 히말라야의 상징이 되었다. 원정대원들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산을 오르고 더러는 은퇴했다. 1978년 라인홀트는 단독으로 낭가바르트를 등정한다. 1999년 낭가바르트의 정상에서 헤르만 불의 피켈이 발견되며 그의 명예는 회복된다. 하지만 사과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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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에이션 루트’를 주창한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는 ‘정당한 방법으로 절대 도달할 수 없는(absolutely inaccessible by fair means)’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후 이 정신은 1953년 낭가파르밧을 등정한 헤르만 불에게 이어졌으며, 라인홀트 메스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낭가파르밧 단독 등정으로 이어졌다. 이 정신은 머메리즘으로 승화됐으며 현대 알피니즘을 대표하는 사조로 발전했다.
1978년 라인홀트 메스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과 그 뒤에 이어진 낭가파르밧의 단독 등정은 히말라야 원정의 내용과 형식을 크게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다. 이 등반은 8000m급 고봉의 연속 등반과 단독 등정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놀라운 일을 해낸 메스너의 등반정신은 어떤 것이며 어디에서 왔을까? 메스너의 낭가파르밧 단독 등정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by fair means란 무슨 뜻인가요?” 장비 이야기를 듣고 있던 테리가 이렇게 물었다. “by fair means란 기본적인 기술 이외에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등반하는 것을 말하죠.”
메스너는 독일어로 낭가파르밧 등반기를 쓰면서 이 부분만은 영어로 표기했으며 이 말을 자신이 낭가파르밧을 단독 등반한 기본 정신으로 내세웠다.
한편 메스너보다 25년 앞서 1953년 낭가파르밧을 초등한 헤르만 불의 <8000미터 위와 아래>에선 더욱더 구체적으로 ‘by fair means’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나는 근대적 기술에 의한 보조적 수단을 쓰지 않고 당신의 말을 따라 by fair means, 즉 순수한 수단으로, 자기 힘으로 낭가파르밧을 올랐습니다.” 이 글 속에 등장하는 ‘당신’은 다름 아닌 머메리를 가리키며, 헤르만 불은 자기의 등정을 1895년 낭가파르밧에 처음 도전한 머메리에게 이렇게 보고한 것이다.
이처럼 헤르만 불과 라인홀트 메스너는 낭가파르밧을 오르면서 머메리의 등반과 정신을 이어받고 실천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by fair means’ 즉 ‘정당한 방법’이야말로 머메리의 정신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머메리가 죽은 지 반세기가 지나 헤르만 불이, 그리고 다시 25년 뒤엔 라인홀트 메스너가 그의 정신과 행동을 따라 오른 ‘산중의 왕’ 낭가파르밧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위대한 등반가들의 정신을 보았다.
히말라야 14좌 등정이 메스너에 의해 완성되기전에는 히말라야는 각나라의 각축장으로 대원정대를 이끌고 가는 국가적인 행사였다. 하지만, 메스너는 단지 정복에 불과하던 등정을 개인적 스포츠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하여 저 포악하기 그지 없는 에베레스트와 히말라야가 곁에 친근하게 다가오게 만들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그는 단순히 정상을 오르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등반 방식(무산소 등정, 단독 등정, 알파인 스타일 등반), 신 루트 개척 등반 등 늘 새로운 방식으로 산을 올랐다. 그에게 있어 히말라야 등반은 위대한 도전이자 산에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그는 산을 정복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등반을 투쟁으로 보지 않았다. 단지 즐겼을 뿐이다. 이러한 그를 두고 일각에서는 '쇼의 명수'라는 혹평을 하기도 했지만 분명 그를 세계 역사상 가장 탁월한 등반가로 꼽는 데는 이견이 없다.
"나는 등정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고전적인 등반가는 아니다. 대신 '정신적인 힘'을 중요시한다. 도전을 창조하는 능력, 목표를 이뤄내는 성취욕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지로 위험과 어려움을 헤치고 정상에 올라야 희열을 맛볼 수 있다. 등반은 높이가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이 중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똑같이 걷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지금 도전해봐라."
" '낭가바르트의 저주'를 말하는 것은 난센스다. 낭가파르바트가 누군가의 '운명의 산'이 된다면 , 그것은 악마가 낭가파르바트를 지배하기 때문이 아니다. 낭가파르바트가 우리 인간보다 무한히 거대하기 때문이다. " -벌거벗은 산 /라인홀트 메스너
"나는 여기 쌓여 있는 눈과 바위와 구름의 감정을 함께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철학이 필요 없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죽음까지도 이해하게 되니까.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요 속에서 분명히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 고독은 두려움이 아닌 나의 힘이었다." -검은 고독 흰 고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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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기술이 발달해 요즘엔 별로 대수롭지 않은 기사 취급을 받는 편이긴 하지만 해발 8,000m 이상의 고산지대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속한다.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들을 모두 14개, 이들 산을 통칭 히말라야 14좌(座)라 부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좌(座)라는 말은 본래 앉는 자리, 지위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종교적 의미로 보자면 불교에서는 부처, 보살, 제천(諸天)의 상(像)을 모시는 자리를 뜻하고, 천주교에서는 주교의 자리, 천문학에서는 별자리를 뜻할 때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14좌 중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8,848m인 에베레스트이고, K2가 8,611m로 두 번째이다. 그리고 마나슬루는 여덟 번째로 해발 8,163m이다. 인간에 의해 가장 먼저 등정된 8,000m급 산은 안나푸르나였고,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악의 참사를 기록한 산은 8,125m의 낭가바르트봉이고, 그 뒤를 칸첸중가가 잇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가장 등정하기 어려웠던 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산은 K2나 에베레스트, 낭가바르트가 아닌 마나슬루였다. 마나슬루(Manaslu)는 산스크리트어로 마나사(Manasa)이며, '영혼'이란 뜻을 지니고 있어 이른바 '영혼의 산'이라 부른다. 2010년 지금까지 14좌에 모두 오른 산악인은 1986년 라인홀트 메스너(이탈리아)를 비롯해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대장 등 모두 18명이다.
2009년 11월 한국의 산악인 고미영씨가 세계에서 9번째 로 높은 해발 8126m의 낭가바르트 정상에 오른 뒤 하산하다가 사고를 당한다. "고씨가 정상에 오른 뒤 내려와 캠프4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하산했다. 해발 6200m지점에 이르렀을 때 고씨가 실족해 벼랑쪽으로 떨어진 것을 대원들이 목격했다" 고한다. 낭가바르트는 수직에 가까운 경사 때문에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및 로체(8516m) 남벽 등과 함께 가장 난이도 높은 루트로 꼽힌다. 1953년 헤르만 불이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할 때까지 7회에 걸쳐 31명의 희생자를 냈다.
*생각나는 것
1. 선택
2. 선택
3. 선택
어떤 내공을 가져야 선택의 갈림길에서 매사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이 사람의 생명같은 비통한 선택인 경우에는 더더욱이말이다..
메스너 같이 강철 같은 사람도 '만약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고통으로 평생을 살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