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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m의 위와 아래(8000m Druber und Drunter 1954)-등정의 진실 본문

독서

8000m의 위와 아래(8000m Druber und Drunter 1954)-등정의 진실

bakingbook 2011. 7. 18. 01:45

sbs스페셜로
고미영의 14좌 등정에 동행했던 그녀의 매니저이자 애인이였던 김재수의 안나푸르나 등정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어 보았다.
고미영은 악명 높은 낭가바르트 등정에서 하산도중 숨졌다.
그로인해 코오롱과 블랙야크 양사가 경쟁을 하며 후원하던 두 여성 산악인의 경쟁이 종막을 고했지만,
고미영이 못다이룬 나머지 히말라야를 오르는 김재수에게는 끝나지 않은 약속이었다.
그중 안나푸르나는 마지막 약속.

두사람의 관계는 비공개였지만 암벽하던 사람들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
오은선의 14좌 여성 최초등정의 위업과 시비속에서 떠오르기도 했던 인물의 다큐를 보니
인간의 한계를 넘는 히말라야 8000미터의 위의 세계속에도 8000미터 아래의 욕망과 번뇌들을 떨어버릴수는 없구나싶었다.
하지만 어쨋든 8000미터를 오르는 일은 목숨을 거는일. 함부러 폄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진실은 그누구보다는 자신이 잘 아는 것이고, 등반과 등정은 온전히 자기와의 싸움이다. 나의 진실을 속이며
8000미터 히말라야를 오르기에는 너무나도 큰 산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니 헤르만 불의 낭가바르트 등정기인 <8000m의 위와 아래(8000m Druber und Drunter 1954)>가 생각났다. 헤르만 불은 최초로 낭가바르트 정상을 오른 산악인이다.

헤르만 불. 29세의 청년이었던 그는 낭가를 올라 하룻밤 사이에 80세의 노인이 되어 돌아왔을 정도로 사경을 넘마드는 힘든 사투 끝에 살아서 돌아 왔다 .


헤르만불은 오스트리아 티롤 출신의 등산가이며 8000m봉 최초의 단독 초등자이다. 산악도시인 인스브루크에서 출생하여 알프스 전지역의 난벽들을 상대로 등산 수업을 하였으며 강한 의지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심신을 단련한 세계적인 등반가다. 그는 힘든 조건만을 골라 겨울철과 야간에 단독등반을 하면서 스스로 냉혹한 채찍질을 하였다.
1947년까지 134개에 이르는 난봉들을 골라 등반했으며, 이중 11개 봉은 초등반을 기록한다. 돌로미테 지역의 최고 난벽 피즈바틸레 북벽을 단독으로 4시간 만에 올라 세인들을 놀라게 했으며, 동부 알프스의 최대 난벽인 표고차 1800m 높이의 와츠만 동벽의 잘츠부르크 루트를 한겨울 밤 시간을 택하여 단독으로 9시간 만에 완등한다. 1953년 2월에 시도된 와츠만 동벽 등반은 낭가파르바트 원정에 앞서 자기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등반이었다.
1952년 여름, 8등을 기록한 아이거 북벽 등반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당대 유럽의 쟁쟁한 클라이머인 장꾸지, 레뷔파 등과 함께 줄을 묶은 이 등반에서 그는 가장 어려운 구간을 선두에서 리딩하였다.
이때 보여준 등반 솜씨에 대해 이 벽의 초등자인 하러조차도 그를 가리켜 ‘신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솜씨였다’고 극찬하여 당시의 비평가들을 침묵시켰다.

그는 23세가 되기 전에 134개의 봉우리에 올랐다. 그는 남들은 여름철에 오르는 암벽을 눈과 얼음이 뒤덮인 겨울철에 올랐다.

그는 고난도의 봉우리 25개를 33시간 만에 주파했다. 왜 그랬을까? 헤르만 불의 답변은 단순하되 묵직하다. “준비였습니다.” 언젠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목숨을 걸고 한판승부를 벌여야 할 ‘궁극의 산’을 만날 텐데, 그때를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산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헤르만 불 자신 역시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는지는 몰랐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준비된 사람만이 그 무엇을 해치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3년의 독일-오스트리아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원으로 발탁되었을 때,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준비해왔는지를 섬광처럼 깨달았다고 한다. 당시 그가 남긴 한 마디는 거의 종교적인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다. “나는 준비했습니다. 내 생애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내가 아직 당신을 몰랐을 때에도 모든 것은 그 준비였습니다.”

그는 1953년 헤를리히 코퍼(K. H. Herrigkoffer)가 이끄는 독일·오스트리아 합동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1934년 이 산에서 희생된 메르클(W. Merkl)을 추모하기 위해 ‘메르클 추모원정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고소 포터의 부족으로 캠프 설치에 많은 시간을 소요했기 때문에 5캠프를 설치하고 정상 공격을 시작할 때는 몬순이 불어 닥쳤다.


기상이 악화되자 대장은 정상공격을 중지하고 캠프를 철수하라고 지시했으나 다시 기상이 호전되자 불, 에르틀(H. Ertl), 프라운 베르거(W.Fraunberger), 켐프터(O. Kempter) 등 4명은 대장의 명령에 불복한 채 정상 공격을 결정한다. 5캠프까지 이들과 함께 오른 불이 단독으로 정상 공격에 나섰다. 정상으로 향하던 중 방풍의, 피켈, 카메라만 남기고 나머지 장비는 크레바스에 넣어둔다. 헤르만 불은 마치 낭가파르바트에 오르기 위하여 태어나고 살아온 사람처럼 그 산에 올랐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원정대장이 귀환을 명령하고 함께 오를 동반자마저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바로 그 순간, 그는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모든 장비들을 다 집어 던지고 저 홀로 정상을 향하여 나아간 것이다. 그는 과연 살아서 내려올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을까?

알 수 없다. 훗날 그는 당시의 결단을 ‘최후의 모험’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어떤 뜻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이다. 하지만 그 과감한 결단의 순간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면 결코 정상에 이를 수 없다. 헤르만 불은 담담하게 증언한다. “8,000m와 같은 거봉은 사람이 최후의 모험을 다하지 않고 손에 넣을 수가 없습니다.”

"발 밑에 시커먼 지옥… 잠들면 죽는다" 8,000m 정상에 꼿꼿이 선 채 '죽음의 밤'보내

그는 7820m 지점에서 흥분제 두 알을 먹고 드디어 오후 2시 독일,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불이 낭가파르바트의 정상에 선 것은 1953년 7월 3일 오후 7시였다. 간단히 말해서 되돌아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는 캄캄한 밤에 저 홀로 하산을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 등정보다 힘든 것이 하산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젠 한 짝이 등산화에서 벗겨져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져버린다. 그에게 남은 장비라고는 이제 등산용 스틱 두 개와 아이젠 한 짝 뿐이다. 정상 부근에는 잠시 궁둥이를 대고 앉아서 쉴만한 공간도 없다.

그는 이 상태에서 꼿꼿이 선채로 비박에 돌입한다. 세계 등반사상 가장 유명한 죽음의 비박이다. 그의 자서전 ‘8,000m의 위와 아래’에는 이 장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그는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훌쩍 넘어버린 초인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게는 추위를 막을 비박색도, 추락을 예방해주는 확보용 자일도 없으나, 앞으로 다가올 밤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모든 일이 그저 당연하기만 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는 잠들면 죽는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도 깜빡 깜빡 잠이 든다. 그때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발 밑에는 시커먼 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아직 별이 있었다. 날이 밝지 않았나 보다.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해가 떠오를 지평선에 시선을 던졌다. 마침내 마지막 별도 흐려졌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후 하산 과정은 너무도 유명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두 차례의 비박을 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다량의 혈액순환 촉진제를 복용한 그는 환청과 환각상태에 시달리면서 하산길을 재촉한다.
동상에 걸린 발가락이 마비되고, 빈사의 상태로 40여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가까스로 5캠프에 도착하여 에르틀의 도움을 받는다.
죽음을 극복하고 베이스캠프로 귀환한 그에게 베풀어진 분위기는 너무나 냉랭했다. 철수명령을 어기고 등정한 행위가 대장측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장 자신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동상에 걸린 발가락을 치료해주지도 않았다. 이후 동상 후유증으로 그는 발가락 두 개를 절단한다.

1954년 불은 <8000m의 위와 아래>라는 낭가파르바트 등정기를 출간한다. 그러나 이 등정기는 대장의 사전 동의 없이 발표되었다 하여 헤를리히 코퍼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다. 이로 인해 불은 오랫동안 심적 고통을 받는다. 원정대 출발에 앞서 대원들은 원정이 끝난 뒤 등반에 관한 글을 발표할 때는 대장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기 때문에 대장은 저작에 관한 계약 위반을 빌미로 불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957년 불은 슈무크(M. Schmuck) 대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브로드피크(8047m)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대장을 포함하여 4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히말라야 등반 사상 가장 규모가 작은 소규모 원정대로 히말라야에서 알파인 스타일을 최초로 실천한 등반대였다. 이들은 산소용구와 고소 포터를 쓰지 않은 채 전 대원 모두가 6950m 높이의 고소캠프까지 직접 짐을 운반하고, 대원 모두가 등정에 성공한다. 불은 이때 그의 생애에 두 번째로 8000m봉 정상을 등정한다. 이 등반을 끝내고 딤베르거(K. Diemberger)와 초골리사(7668m) 등반을 시도하던 중 짙은 안개와 폭풍설 속에서 철수하면서 커니스(눈처마) 붕괴로 인하여 추락사한다.
1953년 낭가파르바트(8126m)에 사상 첫 단독 등정에 성공한 헤르만 불(오스트리아)은 정상에 올라 자신이 들고 올라갔던 'T'자 모양의 등산기구인 '피켈'에 미리 챙겨간 깃발을 묶어 촬영을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사진에 자신의 모습이 없었고 피켈마저 정상에 두고 내려와 46년간 등정 의혹에 휘말렸다. 불의 등정은 1999년 일본의 한 산악인이 정상에서 그 피켈을 발견하면서 인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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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가바르트는 등산 역사에서는 1895년에 첫도전이 시작된 오래된 산이고 58년 동안 31명을
죽이고 나서 허락한 산으로 독일에서 여섯차레의 실패를 겪게하고 한꺼번에 가장 많은
인원 16명이 눈사태로죽었다.

1895년 영국의 A.F. 머메리가 첫 시도를 한 후
1953년 독일·오스트리아 등반대원 H. 불이 첫 등정에 성공하였다.

낭가바르트는 1953년에 불멸의 스타 헤르만 불에 의해 초등되기까지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중 유명한 것은 독일 산악인들 희생
1934년 독일의 2차 원정대에서 10명의 대원을 잃었으며, 3차 원정대는 히말라야 등반사상
최대의 참극을 맞는다. 라키오트 피크 빙벽사이에서 떨어진 눈사태가 캠프를 덮쳐
대원들 한꺼번에 묻어버린다. 7명의 등반대원과 9명의 셀파 등 총 16명 전원 눈더미
속에 영원히 묻혔다.

알파니즘의 역사에서 낭가바르트는 여러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인류 최초로 도전한 8000m 봉이고
둘째 초등 당시 최초로 단독등반이 이루어졌으며
세째 8000m 높이의 산에서 최초의 조난을 기록했고
넷째 단 한번의 눈사태로 16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이 희생되었다는 사실

이 산은 히말라야 8000m 봉우리 가운데 아홉 번째 높은 봉이지만
베이스 캠프에서 정상까지 표고차가 4000~4500로 최고 등반고도를 지닌 산으로
에베레스트, k2, 캉첸중가와 함께 등반성이 높은 산으로 정평이 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