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천재학자로 불리우는 '정약용(1762~1836) '의 부친 정재원은 아비가 아들을 죽이는 시대에 과거를 그만두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며 다시 경안천이 흘러들어오는 풍광의 마재에 칩거하며 아들들이 당화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라며 중앙정계를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재주 많은 정약용은 자신의 재능을 통해 나라의 미래를 펼쳐나가길 바랐고 마침 그를 품어줄 성군 정조를 만나서 막 펼치려던 날개를 무참하게 꺽이고 만다. 하지만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의 일생은 그들이 불사조와 같은 존재로 암흑의 시대에 불을 밝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닫힌 시대, 증오의 시대에 열린 사회를 지향했던 학자와 그 일가에 불어닥친 비극은 단순히 한가문의 비극, 남인만의 비극이 아니라 봉건주의 를 탈피할 수 있었던 가파른 시대의 갈림길에서 나락으로 빠져버린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그들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으나, 시대의 주류는 그들을 미워했으며 혹은 질투했고 죽이려하였으며 거의 뜻을 이루는 듯 하였으나, 그들이 정작 '천명을 죽여도 그를 죽임만 못하다' 했던 정약용을 죽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형제 정약종은 사형되었으며 정약용일가의 사위와 자손들 모두 죽거나 노비가 되어 후손의 벼슬진출이 막히는등 멸문지경이 되었다. 또한 권세를 잡고 유지하려던 세력들의 원한은 정약용을 18년의 유배생활을 통해 사랑하는 가족과 흑산도로 유배된 형 정약전과 찢어져 암흑의 세월을 보내도록 만들었다. 주류였던 노론 뿐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에 쌓였던 남인들은 그럼에도 정약용을 죽이려고 수 번의 시도를 하였고 그 시도는 정약용이 귀양에서 마재로 다시 돌아와 소요하던 죽기 몇년전까지도 계속되었다. 그들은 왜 그토록 정약용을 죽이려했을까. 아니 왜 그리 무서워했을까....
천재라고까지 일컬어지는 그의 지식과 능력? 혹은 그런 그를 사랑하고 아꼈던 정조? 노론의 세계에 도전장을 던진 그에 대한 괘씸죄?
14년후 그의 해배가 결정되었을 때 흑산도에 귀양가있던 형 정약전은 자신을 만나러올 동생을 기다리기위해 우이도까지 이사를 한다. 그럼에도 정약전이 16년만에 귀양지에서 죽기까지 정약용은 형을 만나러 갈 수 없었다. 왠일인지 그이 해배 명성서는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 18년만에 사간원 응교 이태순이
"정계가 되었는데도 의금부에서 석방공문을 보내지 않은 것은 국조이래 아직까지 없던 일입니다. 여기서 파생될 폐단이 얼마나 많을지 알수가 없는 일입니다." 라는 상소를 올린 연후에야 해배공문이 보내지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 신유년(1801) 봄에 옥중에 있을 때 하루는 근심하고 걱정하다 잠이 든 꿈결에 어떤 노인이 꾸짖기를 "소무는 19년도 참고 견디었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괴로움도 참지 못한다는 말인가" 라고 했었다. 옥에서 나오던 때에 당하여 헤아려 보니, 옥에 있던 것이 꼭 19일이어었다.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헤아려보니 경신년 벼슬길에서 물러나던 때부터 또 19년이 되었다. 인생의 화와 복이란 정말로 운명에 정해져있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그는 그의 아버지가 벼슬을 접고 자리잡았던 아름다운 그의 고향 마재에 돌아가 <자찬묘지명>을 썼다. 그로 부터 18년후 그의 유언대로 그의 집 뒤뜰에 묻혔는데 누가 보아도 명당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귀양간 동안의 정력적인 집필을한반면 고향에 돌아와서는 자서전식의 <자찬묘지명> 에 후세 사람들이 그의 삶에 대해 파악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쓰고 있다. 일찌기 볼 수 없었던 한 가문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게 된 연원에 대해 그처럼 정확하고 날카롭게 갈파하는 이 또한 없을 것이다.
그를 미워한 이들은 그를 죽음에 가까운 상태로 빠뜨렸으나, 그는 그 18년 동안 삼백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서적을 집필해서 오늘날 '다산학'을 이룰 수 있게 했다. 그 서적 하나하나가 많은 문헌을 참고하여 전문적이고 자세하며 방대하여,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를 정녕 천재에 가깝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격량에 휩싸여서도 휘둘리지 않은 모습에서 철인의 풍모를 읽지 않을 수 없다.....
선생께서 1804년 유배지 강경에서 지은 '독소'를 보면 그의 시는 그의 학문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삶에 뿌리를 두고 현세태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풍이 느껴지는 것이 그의 방대한 독서와 성찰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나 홀로 웃는 것(獨笑) - 茶山 丁若鏞
有粟無人食 (유속무인식)
양식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多男必患飢 (다남필환기)
아들 많은 집엔 굶주림이 있으며,
達官必?愚 (달관필준우)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才者無所施 (재자무소시)
재주 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 없다.
家室少完福 (가실소완복)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至道常陵遲 (지도상릉지)
지극한 도는 늘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翁嗇子每蕩 (옹색자매탕)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婦慧郞必癡 (부혜랑필치)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다.
月滿頻値雲 (월만빈치운)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花開風誤之 (화개풍오지)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物物盡如此 (물물진여차)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獨笑無人知 (독소무인지)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걸.
***
내가 천주교를 받아들여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던 것은 고1때 였다. 교리시간에는 천주교 순교자들중 정약종과 이승훈의 이름이 나왔다.
그 많은 이들이 정약용과 관련이 되어있다. 정약용이 훗날 기술하듯 그의 비극은 이미 피할 수 없는 도도한 물길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한 시대의 비극이 온전히 한 가문에 무게지워질 수 있었을까.
노론의 시대에서 숨길을 막혀버린 남인들, 영특하지만 뜻을 펼칠 수 없는 암흑의 시대 그들이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 앞에 만인이 평등한 종교사상은 그당시 위정자들에게는 위협적인 것이었으므로 피바람이 불지 않을 수 없었고, 그시대의 선비들은 당대의 천재들을 죽이거나 매장해버렸다.
그러니 안되는 나라로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은 정조 사후라고 후세 사람들은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후의 조선의 역사는 이미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파란만장하지만 재미 없게 산(?) 정약용에 관한 넌픽션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형들과 여동생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많은 자료를 통해 조명하고 있다. 그당시 최고의 학자이기도 했던 정조 임금의 엄청난 총애 속에서 훈육되어 미래를 짊어질 정치가로 키워지지만, 그의 아버지의 뜻과 달리 정치에 휘말려 가문이 풍비박산되어 겨우 목숨을 부지한게 천운일 정도의 나락으로 빠지는 정약용의 삶은 그 자체가 파란만장한 그 시대의 역사가 들어있지만 개인으로서의 정약용은 정치에서도 정조대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으나 항상 노론의 견제를 받아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고, 귀양가있는 동안 끊임없이 책을 썼을 뿐 별다른 연애사건도 없는 올곧은 학자였을 뿐으로 참으로 재미없게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봉건시대 양반의 자제로서 새로운 학문이 서학을 받아들여 응용하였던 근대적 학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거인이기도 하다.
작가의 표현처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이 죽어나갔던 당파와 가문의 시대, 그시대를 연명한 선비들에게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질문할 수 있을까.
한가문의 일신을 위해 그들이 혈안이 되었던 당리당략은 천재들을 죽이고 한나라의 국운을 쇄하게 하였으며 마침내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에 이르르고 네버엔딩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켰다. 이 모든 것에서 그들은 '무죄'임을 항변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