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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야기/한국일기

큰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bakingbook 2009. 12. 28. 19:51

2009/12/28 01:10


'걷기는 사유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도 친숙한 동작이다' (밥벌이의 지겨움/김훈) ,

그러나 전 날 눈이 밤새 펑펑 쏟아져 산간지역이 고립된 다음날

그 눈길을 두발로 디디며 걷는 일은 꽤나 신비롭다.

실은 길에 따라 풍경에 따라, 마음에 따라, 동반자에 따라 길을 걷는 일은 매우 낯설어지기도 한다....

2009년 12월 25일 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밤샘스키를 꿈꾸던 나는 스키장 가는 길목에 줄을 길게 늘어선 차량들에 이미 지쳐있었다.

하지만, 팬션으로 돌아가는 도중 민가에 먹을 것을 찾아 숨어든 고라니를 발견했다.

겨울에는 산에 먹을 것이 없어 민가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고라니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고개를 쳐들었다. 사슴에서 뿔만 없앤거 같은 귀를 쫑긋 세운것이 정말 놀란듯 보였다

팬션에서의 모닥불 아니 난로불 파티를 하면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하여, 그칠줄을 모른다.

다시 고개를 하나 넘어 스키장을 가기에는 무모한 일이 되버린 후, 산간에 고립된 팬션의 나는 배고픈 고라니와 함께 밤을 지내게 된 것이다. ^^

담날 아침, 고라니는 산에서 내려오는데, 일행은 산으로 올라갔다..어제밤의 고라니는 지금 곤히 자고 있을까...고픈 배는 채웠을까...

이 근처의 산은 소리산. 왕복 2시간여의 짧은 코스지만 아기자기하고 예쁘다고 한다.아침밥도 거른채, 산을 올라가는 이들의 굶주림은 무엇일까...

나는 새로산 체인젠도 실험할겸, 보드복과 털옷으로 한마리 흑곰처럼 무장을 한 채 이 한번도 걷지 못한 길을 산책하기로한다. 산을 오르면 보이는 홍천의 큰 풍경이 아쉽기도 하지만, 산을 오르는 일은 늘 쉽지 않은 일이기에 간만에 혼자만의 여유를 가지기로 한다.

하지만 낯선 길에 홀로 서니 밀어닥치는 자유로움에 정신이 잠시 어찔하다.

구름이 걷히고 새파랗다 못해 새하얀 하늘이 열리니 하얀 땅위의 길과 하늘의 길이 잇다아 있음을 알겠다.

이길은 어쩜 특별하지 않은 흔한 시골길이지만, 서울이나 용인의 길과는 다르다.

빛을 빨아들여 생명을 건사하고, 빛과 더불어 살고, 빛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품어내는 저 억겁의 이파리들은 지금 하얀 옷 속에 생명을 품고 있다. 그 생생한 생명력을 느기며, 길을 걷는 일이 이다지도 많은 에너지를 나에게 주다니 나는 광합성작용이 결핍되어 있는 인간이기때문인 것이겠지.. 결핍되어 있는 것이 엽록소뿐이겠는가...4차원을 본다는 캣츠아이,에베레스트를 거뜬히 오르는 튼튼한 심장과 다리ㅂ,한번만 보고도 사전을 외우는 뇌, 억만광년을 볼 수 있는 망원경, 그리고...돌로 금을 만든다는 연금술...

무엇하나 가진 것이 없네.ㅡㅡ 기껏해야 훈민정음 24글자를 꿰어 맞춰 붙였다 뗐다 하는 글쓰기

세치혀를 나불대며 나보다 조금이라도 모르는 애들 가르쳐 보겠다고 하는 강의, 가르치긴 몰 가르치는가, 배울 것이 더 많으면서말이다.

언제부턴가, 추상적인 지식을 머리 속에 넣을 때, 이성적인 사리분별과, 조금은 더 고차원적인 최종판단을 할 때, 갈증을 느낀 곤 한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때문이다.

산에 오르기 전에 큰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 서면 펼쳐지는 아랫동네들의 모습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게 산을 오르는 것이다. 올라가야 볼 수 있기에...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시간만 나면 북한산, 설악산, 한라산, 우리 동네 뒷산을 열심히 찾아가고 온갖 지도와 다양한 입산경로와 하산로를 알지만 혹여 정상을 못오르더라도 동경을 가지고 에베레스트 K 2 험악한 봉우리와 변덕많은 날씨를 무릎쓰고 오르는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사람'이란'산'은 모른다....

어쩌면 사람은 산보다 더 복잡하고 험난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산의 정상에 오르면 보일 것이다. 무언가가... 나는 오늘도 오르지는 않고 넘 힘들다고 불평하고 있다.

소리산을 오르지는 않았지만, 거리를 걸으니 산의 전체 자태가 보인다. 어쩌면 산을 오른다면서 진정한 산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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